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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시로 쓰는 편지 - 13|소만(小滿)|나희덕

by 안영선 2014. 4. 15.

 

소만(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소만(小滿)이라는 말 참 좋지요. 꽃이 가고 잎이 오는 절기. 언젠가부터 꽃보다 초록이 더 좋아지더라는 당신의 말을 기억합니다. 초록에게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때가 있듯, 우리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채워나가야 할까요. 오랜 꿈인 “조금 빈 것도 같게/조금 넘을 것도 같게”의 경지란 쉽지 않네요. 허공에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약속처럼 “마음의 그늘도/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가 다가옵니다. 일상은 혹은 일생은 꽃, 초록, 그늘 아래 머물다가는 역사에 다름 아니겠지요. 당신과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곧 그늘이 깊어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겠지요. 의식처럼 “소만 지나면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겠지요.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차라리 음악일 겁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곧 들려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라는 간절함. 이은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