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답사기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영랑의 오월 - 김영랑

안영선 2009. 8. 3. 12:23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영랑의 오월

- 영랑 김윤식 -

 

 

안 영 선


북도에는 소월, 남도에는 영랑


  지금부터 20여 년 전,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무슨 동아리 활동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문학 동아리인 문예반 선배들이다. 아직 학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후배들의 교실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동아리 소개를 하는 선배들 중에는 문예반 선배들도 있었는데 정지용, 홍사용, 김영랑, 김유정, 박종화, 이태준, 오장환, 정훈, 박재륜, 이무영 등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쟁쟁한 휘문 출신의 문학가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가입을 종용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시절 글짓기대회에서 입상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예반에 들어가기 위해 관문처럼 치러지는 시험을 보고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선배들은 시 한 편을 나누어 주며 외우라고 한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것이 김영랑과 나의 첫 만남이 되는 셈이다. 밤을 새워가며 암송하던 기억과 틀릴 때마다 붉어지는 선배들의 얼굴.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들. 모란꽃은 어떤 모양일까, 시인이 기다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은 무엇일까.

 

 

  흔히 한국 순수서정시를 거론할 때면 ‘약산의 진달래꽃’을 사랑한 시인 김소월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시속에 등장하는 한국적인 정서와 운율은 그를 1920년대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30년 박용철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하며 언어의 아름다운 조탁과 감미로운 음악성을 표현한 김영랑의 등장은 한국 시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사건이었다. 북도에 소월이 있다면, 남도에는 영랑이 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두 위대한 시인의 이름은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1연 -

엄마야 누나야 강변(江邊)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金)모래빛,

뒷문(門)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江邊) 살자.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전문 -


  위에 있는 김소월과 김영랑의 시를 읽어보면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은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속에 묻어나는 소박하고 진솔한 정서며, 그 속에 흐르는 음악적인 운율감이며, 작품 속에서 담아내는 동경의 세계는 마치 한 시인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두 시인은 함께 할 수 없었다. 김영랑이 화려하게 문단 활동을 할 때 김소월은 고향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만약 두 시인이 마주 앉아 대화를 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해남에서 강진으로 가는 길


  해남에서의 바쁜 답사 일정을 마치고 김영랑과 다산 정약용의 넋이 살아 숨쉬는 강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새파란 가을 하늘 밑으로 산자락이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낸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이 피로에 지친 몸을 추스르게 한다. 18번 국도를 타고 달리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다는 다산초당 안내판이 여행객의 발목을 잡는다. 아쉬운 마음에 만덕산 자락에 있는 다산초당과 다산유물전시관을 돌아보고 다시 강진읍을 향해 달려간다. 

  강진은 수려한 월출산과 맑은 탐진강, 육지 깊숙이 밀려들어오는 강진만의 바닷물이 만들어 낸 천혜의 자연 경관과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비록 인구 4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그 속에는 도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삶의 여유와 넉넉함이 넘쳐난다. 그렇기에 김영랑과 같은 위대한 시인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번지. 일명 탑골이라고 불리는 이곳이 [시문학파]이며 1930년대 순수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 김영랑의 생가이다. 강진읍에서 김영랑의 생가를 찾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진읍에 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영랑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가게의 간판이나 도로 이정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만큼 김영랑은 강진의 가장 대표적 자랑거리인 셈이다. 강진군청 옆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서자 가지런히 쌓아 올린 돌담 하나가 옛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지방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어 군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김영랑 생가는 다른 어느 시인의 생가보다도 복원과 조경,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생가 앞에 도착하자 시인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진 시비가 다정스레 손님을 맞는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올려 만든 시비는 초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처음 김영랑 생가를 방문했을 때에는 사랑채 옆에 흉물스러운 시비가 놓여 있었다. 생가의 분위기에도 전혀 맞지 않는 마치 급조된 반공기념비 같은 모양의 시비를 보면서 아쉬워했던 생각이 난다. 결국 많은 문학인들의 항의를 통해 철거가 되고 생가 앞에 새롭게 시비가 세워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김영랑이 태어났다는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 칸으로 이루어진 안채는 시인이 생활하던 모습을 재연해 놓았고, 부엌에는 금방이라도 살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잘 정돈되어 있다. 안채 앞마당에는 돌로 예쁘게 쌓아 올린 우물이 있는데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상상을 해 본다.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것 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 <마당 앞 맑은 새암을> 중에서 -


  김영랑도 이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티 없이 맑은 우물물에 자신의 맑은 영혼을 담아 노래했을 것이다.

 

  안채 옆에는 장독대가 있다.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한껏 폼을 잡고 있는 것이 어린 시절 고향의 앞마당을 떠올리게 한다. 술래잡기를 할 때면 언제나 작은 내 몸 하나는 넉넉히 감싸 안아주던 놀이의 공간 장독대. 시인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술래잡기를 했을까. 꼭꼭 숨어서 쳐다보는 감나무의 붉은 감잎, 바람결에 장광(=장독대)으로 날아드는 감잎을 보며 놀란 듯이 쳐다보던 시인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안채와 좀 떨어져 있는 사랑채는 김영랑을 위한 공간이며, 시의 공간이었다. 젊은 시절에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이제는 제법 커서 여행객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 준다. 툇마루 옆에서 노랗게 익어 가는 유자나무와 연못도 이 사랑채를 돋보이게 한다. 김영랑은 많은 시간을 이 사랑채에서 생활하며 작품을 썼다. 툇마루에 앉아 모란꽃도 바라보고, 뒤 산 언덕과 동백나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돌담도 바라보면서 그는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을 마음껏 실험했을 것이다.

  김영랑은 이 사랑채에서 유명한 명창들을 불러들여 노래듣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한 때 음악 공부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직접 음악을 공부할 수는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그는 집으로 임방울․이중선과 같은 명창들을 불러 들였고, 그들을 통해 남도 가락 특히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 옆에는 1996년 6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세운 문학 표징이 있다. 표징에는 “이곳은 [시문학]동인으로 참여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는>, <가늘한 내음> 등 남도의 정서를 전통적 운율로 읊어낸 주옥같은 서정시를 남김으로써 한국 시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영랑 김윤식 시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그의 예술혼이 감돌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김영랑 생가가 지닌 문학적 가치와 의의를 되새기게 한다.    

 

 

  김영랑은 이 생가에서 40여 년을 살았고, 작품의 대부분도 이곳에서 지었으니 이 생가야말로 영랑 문학의 고향이요, 산실이다. 사실 김영랑의 생가에는 그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들이 많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은>을 떠올리게 하는 안채 앞마당에 있는 우물, <오매 단풍 들 것네>에 등장하는 장독대와 감나무를 비롯하여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의 소재가 된 돌담, 생가 뒤편의 언덕을 보고 썼다는 <언덕에 누워>, 사랑채 옆에 모란을 심어 놓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썼다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그의 문단 데뷔작인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의 소재가 된 대나무 숲과 동백나무는 아직도 생가의 든든한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생가에서 나오면 약 30m 거리에 있는 강진향토문화관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에서도 김영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강진지역 출신의 예술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2003년 4월에 개관한 향토문화관은 2백80여평 부지에 지상 2층, 연면적 1백30평 규모로 김영랑과 김현구 등 지역 출신 시인의 생전 활동 사진과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곳의 시감상실에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 것네>, <동백잎이 빛나는 마음>, <독을 차고> 등 김영랑의 대표작을 서예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생가를 돌아본 후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군립도서관 앞에 있는 어린이 공원이다. 군립도서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 도서관 앞 놀이터에는 두 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김영랑의 시비 <모란이 피기까지는>이고, 다른 하나는 김영랑의 문학 동반자이며 [시문학]동인으로 한국의 순수서정시를 이끌었던 김현구의 시비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이다.

 

  

  김영랑의 시비는 1975년 7월에 세워졌는데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이 아니라 멋스러움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콘크리트 기둥에 쇠파이프와 쇠사슬로 둘러싸인 모습이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이왕 시비를 건립하려고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미적인 가치도 고려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생가 안에 있던 시비처럼 철거되는 아픔을 다시는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또한 아쉬운 것은 김영랑의 대표작도 많은데 시비는 오직 <모란이 피기까지는>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의 문학비가 이 강진 땅에 세워질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도서관 앞에 있는 시비를 답사하고 도착한 곳은 강진소방서 앞에 있는 영랑공원이다. 말이 공원이지 도로 가운데 있는 로터리라고 볼 수 있다. 장흥에서 강진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영랑공원에는 ‘영랑 김윤식 상’이라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아래 부분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남도 문학의 꽃을 피운 김영랑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오가는 수많은 차량의 배기가스를 마시며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김영랑은 강진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남도의 자랑이요, 한국 문학의 자랑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영랑의 시 한 두 편 정도는 외울 정도로 우리에게는 친숙한 시인이 되었다. 강진 답사를 마치며 김영랑을 위한 문학관이나 홈페이지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나만의 욕심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