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읽기

[이은규] 기억의 체증

안영선 2009. 8. 4. 13:07

기억의 체증 / 이은규

 

 

몸이라는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들

저마다 자리를 움트는 족족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요사이 당신이라는 집에 세들고 싶다는 나의 목소리가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서성이고

자주 식욕이라는 덜 빈 잣죽 그릇과 마주했다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피가 그런걸 어떡해 라고 대답했다

 

사혈(瀉血), 피를 흐르게 하다

기억처럼 긴 실로 엄지 손가락을 묶는다

손톱 끝의 검게 갇힌 시간들을 찌르는 바늘

맺힌 시간의 피돌기가 풀리며 건네는

피의 말이 멀리서 들릴까

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그 말들의 뜻

동그랗게 말려 올라오는 검붉은 시간들

언젠가는 열망으로 맺히던 기억의 끝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들의 전언

내 몸에 잠겨 있던 전언들이 피가 되고

그 피가 살이 되어 생의 피돌기로 살아 있다

 

검은 시간은 흘러 없어질 거라는 환한, 착각

울지 않기 위해 시간의 잇몸을 앙다물다

시시로 미치던 피의 순간이 있었다

기억의 체증에 오래 시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

바람을 숨으로 빚어내는 것도 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이

꿈인 것만 같은 꿈

 

 

2008년 『불교문예』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