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해학이 묻어나는 실레마을 - 김유정
웃음과 해학이 묻어나는 실레마을
- 김유정 -
안 영 선
실레마을로 가는 길
호반의 도시 춘천은 대학 생활의 낭만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으로 떠올리게 된다. 물론 나에게도 춘천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준 곳으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나 처음 기차 여행을 갔던 곳이 바로 춘천이었으니 지도만 들여다봐도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북한강을 끼고 달려가는 경춘가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20대의 젊음을 충동질하며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7080 세대의 단골 MT 장소가 되었던 남이섬과 강촌의 추억이 물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그 길을 달려간다. 옛날처럼 기차에 몸을 싣고 통기타를 치며 흥겨워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경춘가도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으며 넉넉한 마음으로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것도 재미가 솔솔 느껴진다. 달리는 차창 속으로 스며드는 맑고 시원한 강바람이 초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46번 국도를 따라 한참을 달리면 남이섬으로 유명한 가평을 지나게 된다. 남이섬은 조선의 명장이었던 남이 장군의 묘가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대학 시절의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가끔씩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섬 안에 있는 아름다운 가로수 길은 겨울연가 등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가 될 정도로 유명새를 타고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영향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 남이섬과 춘천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웃음 속에서 진솔한 농촌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담아냈다는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며, 작가의 고향인 실레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그래서 더 즐거운 지도 모른다.
가평을 지나 의암댐을 건너 춘천 나들목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도로의 왼쪽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춘천시 신동면 증리.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고향인 실레마을이다. 초행길이라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정표가 잘 준비되어 있어 문화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김유정을 사랑하는 춘천 사람들의 정을 느껴볼 수 있다.
실레마을은 면소재지요, 기차역이 있는 곳이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고향의 풋풋한 인심이 묻어나는 조용한 마을이다. 드라마 ‘간이역’의 무대이며,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유명한 기차역을 찾아간다. ‘김유정역’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담한 기차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 12월에 ‘김유정역’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고 한다. 기차역 앞 화단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기차역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인상적이다. ‘김유정역’은 경춘선의 대표적인 간이역이지만 이제는 제법 김유정을 찾는 답사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70년을 이어온 기차역의 이름까지 바뀔 정도로 실레마을은 김유정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실레마을에서 만난 김유정
김유정역을 나와 도로를 건너면 김유정문학촌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김유정문학촌은 2002년 8월 6일에 개관을 했으며 <우상의 눈물>로 유명한 전상국 소설가가 촌장을 맡고 있다. 금병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의 끝자락에 건립된 김유정문학촌은 입구부터 김유정과 관련된 문학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다. 마치 고궁처럼 웅장한 출입문에는 ‘김유정문학촌’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문학촌 안으로 들어서자 기와를 올린 김유정기념전시관과 초가로 복원된 생가가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문학촌에는 작가의 생가와 기념관, 김유정 동상, 디딜방아간, 연못과 휴게정, 우물, 화장실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어 시골의 정겨운 정취가 묻어난다.
김유정문학촌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아 들어간 곳은 김유정 문학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김유정의 대표작인 <봄봄>의 첫 페이지를 책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책갈피 속에서 펼쳐지는 김유정에 대한 영상물은 방문객들이 작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단층의 전시장이지만 작가와 관련된 자료들이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다. 작가의 생애를 기록한 전시물이며, 작품의 배경이 된 실레마을의 지도, 김유정의 발표 작품이 수록된 잡지와 각 출판사에서 펴낸 단행본들이 눈길을 끈다. 구인회 활동을 담은 전시물과 작가가 가깝게 사귀었던 문우들에 대한 소개, 1930년대 농촌소설이나 해학문학에 대한 소개, 봄봄의 한 장면을 인형 모형으로 만든 전시물까지 어느 것 하나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함께 전시관을 돌아보며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신 간사님의 도움으로 전시물을 촬영할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리게 되었다. 김유정문학촌에서는 매년 김유정의 기일을 맞아 김유정기념사업회와 강원일보 주최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동백꽃이 피는 4월에 열리는 김유정문학제를 비롯하여 매년 10월에 열리는 전국백일장, 김유정 소설문학상 등 다양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단체로 방문을 하는 경우에는 문학 현장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직접 안내까지 맡아준다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 있을까. 전시관 곳곳을 안내해 주시고 마지막에는 관련 자료까지 챙겨 건네 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전시관 왼쪽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생가가 있다. 이 동상은 김유정이 1994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김유정기념사업회가 그 해 10월에 춘천문화예술회관 안에 세웠던 것을 김유정문학촌이 개관하면서 옮겨온 것이다. 두루마기 차림에 책을 펴 들고 있는 모습의 동상을 보자 농촌계몽을 위해 야학당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김유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생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김유정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으리라. 생가 앞에 있는 우물이며, 뒷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가 생가의 모습을 더욱 포근하게 만든다.
김유정의 생가는 ㅁ자형으로 전형적인 전통 가옥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대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가옥 구조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대청마루와 사랑채, 부엌, 헛간까지 고루 갖추어져 있다.
이 생가는 다른 지역의 생가처럼 관람을 위해서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섬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인상적이다. 이 생가는 김유정이 태어난 집 모양 그대로 짓기 위해 철저한 고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가 내부의 한쪽 벽에는 김유정의 조카인 김영수씨가 직접 그린 생가의 평면도가 걸려 있어 건축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김유정의 집필 장소가 되었을 사랑방 툇마루에 앉아 본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배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유정이 계몽 운동을 위해 움막으로 야학을 만들었다는 터가 보이고, 그 너머로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금병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국농장 옆의 동백꽃 길은 소설 속의 점순이와 주인공이 노란 동백꽃 숲으로 파묻히는 배경이 되는 곳이다. 원래 동백꽃이라고 하면 주로 남부지방에서 피는 빨간 꽃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노란 동백꽃은 원래 생강나무 꽃이다. 이 생강나무를 강원도에서는 동백꽃 또는 개동백이라고 부른다. 동백꽃 길 위쪽으로는 봄봄 길, 산골 나그네 길, 금 따는 콩밭 길, 만무방 길 등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다시 고개를 돌려 마을 쪽을 바라보면 <봄봄>의 배경이 된 김봉필의 집터가 보이고, 그 뒤로 금병의숙과 <산골>의 배경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생가에서 바라보는 풍경 하나 하나가 그대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김유정에게 있어서 실레마을은 소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리라.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직접 보고, 생활하고, 느끼고,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기에 그의 소설은 다른 어떤 농촌 소설보다도 더 현실감 있는 작품으로 남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생가 옆에 지어진 디딜방아간은 시골에서 사용하던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작은 농업박물관을 연상하게 한다. 디딜방아, 보습, 쇠스랑, 씨래, 가래, 함지, 삼태기 등 정겨운 이름이 붙어 있어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체험의 시간이 될 것이다.
화장실의 초가 지붕에는 박 넝쿨이 하얀 박꽃을 피우고 있다. 박꽃과 넝쿨 사이로 수줍은 듯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박이 앙증맞다.
생가 주변은 방문객을 위한 휴식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잔디밭 사이로 작은 연못과 모정이 있고, 여러 종류의 나무와 조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와 금병의숙으로 향했다. 마을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금병의숙은 1932년 김유정이 불타 없어진 야학당을 넓게 옮겨 지으며 금병의숙이라 이름을 붙이고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곳이다. 김유정은 이곳에서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40평 규모의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붉은 벽돌로 새로 단장을 하여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금병의숙은 마을 회관과 노인정으로 사용이 되고 있으며, 김유정문학제가 열릴 때에만 세미나를 개최하는 장소로 이용이 되고 있다. 금병의숙 마당에는 1978년 3월 29일 김유정의 기일을 맞아 건립한 ‘김유정기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소설가 김동리가 비문을 썼다고 한다. 기적비의 하단에는 김유정의 고향이야기를 담은 수필 <五月의 산골작이>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그러나 산천의 풍경으로 따지자만 흠잡을 데 없는 귀여운 전원이다.
산에는 기화어초로 바닥을 틀었고, 여기 저기에 졸졸거리며 내솟는 약수도 맑고,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 골골거리며 까치와 시비를 하는 노란 꾀꼬리도 좋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 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 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을 보는 듯하다
- 기적비에 새겨진 <五月의 산골작이> -
비문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김유정이 얼마나 실레마을을 사랑하는지 잘 나타나 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고향에 돌아와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고향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시간에 여유를 갖고 실레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 속의 배경을 찾아 산책을 즐겨보는 것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실레마을을 출발하여 김유정의 문인비가 세워져 있는 의암댐으로 발길을 돌렸다. 46번 국도를 따라 서울 방향으로 2km 정도 가다가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춘천 시내로 들어가는 70번 지방도로를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3km 남짓 가서 한국전기안전공사 앞에서 좌회전하면 의암댐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이어지는데 이 도로가 서울로 가는 구도로였다고 한다.
김유정의 문인비는 의암댐 못 미쳐 신연교 부근에 있다. 워낙 의암호의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스쳐 지나기 쉽다. 나 역시 자연에 넋을 팔다가 신연교를 건너 의암호 건너편까지 갔던 기억이 새롭다. 문인비가 있는 도로는 길이 좁고 마땅히 주차할 만한 곳이 없어 주의해야 한다. 의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김유정 문인비는 1968년 5월 29일 김유정기념사업회에 의해 세워졌는데 펜촉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하단의 비문에는 대표작 <산골 나그네>의 일부와 김유정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 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 소리 골을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풍!
- 문인비에 새겨진 <산골 나그네> -
춘천 시내에서 만나는 김유정의 흔적으로는 공지천 조각공원에 있는 문학비와 춘천시립도서관 3층에 마련된 김유정 문학 코너가 있다. 공지천은 춘천 시민을 위한 대표적인 휴양지로 조각공원을 비롯하여 분수대와 잔디광장, 각종 체육 시설 및 야외공연장을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의 나들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매년 여름에는 강변가요제가 열리기도 하여 춘천을 문화 관광의 도시로 만든다.
조각공원에 있는 김유정의 문학비는 1994년 10월에 건립된 것으로 조각공원에 알맞게 예술적인 조형미가 뛰어나 다른 조각품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학비의 뒷면 하단에는 소설 <소낙비>의 첫머리가 새겨져 있다.
공지천 건너에 있는 춘천시립도서관에는 특별히 김유정 문학 코너라는 것이 있다. 큰 기대를 걸고 찾아간 것에 비해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춘천 시민의 마음만은 담아 올 수 있었다. 주로 김유정의 단편 소설과 김유정 관련 논문들을 모아 놓고 있어 김유정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할 때 활용하면 좋을 듯 싶다.
2008년 《경기교육》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