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읽기
[박후기] 묵
안영선
2010. 4. 8. 22:00
묵 / 박후기
주점(酒店) 홍등 아래 앉아
묵을 먹는다
청춘을 잃고 뒤늦게
연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
잡힐 듯 말 듯
의심 많던 손아귀에서 끝내
부서져버린 첫사랑을 생각한다
움켜쥔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탕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오늘이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여자도
도망칠 내일도 없던 날들이었다
다시, 교문 앞에 돌아와
묵을 먹는다
젓가락질은 여전히 서툴고,
정든 화실(畵室) 앞에서
첫사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제 살을 베는 칼날
묵묵히 받아들이며 쓰러진
묵을 먹는다 어느덧
뜨거운 가슴 식어버려
몸에 칼이 들어와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차가워진 나를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