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읽기

[박후기] 빈집

안영선 2010. 4. 8. 22:06

빈집 / 박후기




말뚝 앞에 무릎 꿇은 소처럼,

재개발지구 빈집 한 채

전신주에 몸 묶인 채

순하게 앉아 있다

ㅅ 자 슬레이트 지붕

길마*처럼 걸치고

자꾸 미끄러져 내리는 늙은

호박 넌출 가까스로

추켜올리고 있다

벽마다 균열이 뿌리 내리고,

문이란 문 오두 열어 젖힌 채

깊은 한숨 쉬는 이 집의

마지막 주인은 죽음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손님처럼 왔다 갈 뿐,

죽음만이 주소지를 옮기지 않는다

꽃피는 봄이 오면

무너진 무덤 위에서,

붕붕거리며 벌들의

삽질이 시작될 것이다

흙먼지 꽃가루처럼 날리며

아파트가

벌집처럼 들어설 것이다.


* 짐을 싣기 위해 소의 등에 안장처럼 얹는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