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읽기

[이향란]-종鐘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질 때

안영선 2010. 7. 19. 15:28

 

 

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질 때 / 이향란

 

 

 

 

푸른 계절과 울음을 가둔 그림 속엔 자물쇠가 보이지 않게 늘어져 있고

의 두터운 입술은 오래 전 이미 지워졌다

 

한 점 적막을 종루 삼았다고

녹슬지 않는 시간을 물고 서서히 굳어버렸노라고

단지 그렇게만 읽혀지는 그림

그 무엇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는 불구의 풍경을 내걸고

눈길이 더듬는 대로 훑는 대로 자꾸 메마르고 얇아지는 그림

 

문득 이름이라도 지어 주고 싶어서

비스듬히 기울어 가는 햇살에 이끌려 그 앞에 다가서 본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제 안 깊숙이 저물어 가는 소리는 끊임없이 뒤척이는지

찬바람에 휩쓸려 시리고 거친 손이지만

종이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어루만질 때,

 

한순간 뜨겁게 울음을 털어버리는 소리의 유분遺粉

 

한 몸이 다가가 또 한 몸에게 말을 걸 때, 미끄러질 때, 스며들 때,

박제됐던 풍경은 숲속 어딘가로 금세 모습을 감추고

그 빈자리에서 파문처럼 번지는 적요, 몸을 떠는 종

 

종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진다는 것

그리하여 소리가 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