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詩읽기

[유안진]-세로수길 외 2편

안영선 2010. 7. 19. 15:30

세로수길 외 2편 / 유안진

 

 

 

 

혼자 걸어도 아베크가 되고

발걸음 저절로 사색이 되었다던

우거진 가로수의 가로수길 거리

이렇게 생긴 길을 느릿느릿 걷다가

저렇게 생긴 나무 아래서 멍청히 서 있기도 했을 텐데

서울에서도 강남이라고

노점 자동차 소음만 넘쳐났다

이 틈 저 틈 사이를 요리조리 걷느라

짜증 심통 부풀어 올라 폭발하기 직전에

비스듬 한갓진 길이 세로로 휘어져 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다더니

가로수 길 막혀서 생겼다는 세로수길이다

이름처럼 세로로 길게 누웠다

길옆 나무들도 길게 세로로 줄지어 섰다

쌍쌍들도 혼자들도 세로로만 걷는다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걸음걸이다

돌아와 거울 보니

눈 코 입 귀 모두 세로로 붙어 있다.

 

 

 

서로를 욕되게 말자고

 

 

 

 

아지랑이 눈빛과

휘파람에 얹힌 말과

안개 핀 강물에 뿌린 노래가

사랑을 팔고 싶은 날에

 

술잔이 입술을

눈물이 눈을

더운 피가 심장을

팔고 싶은 날에도

 

프랑스의 한 봉쇄수도원 수녀들은

붉은 포도주 ‘가시밭길’을 담그고

 

중국의 어느 산간 마을 노인들은

맑은 독주 ‘백년고독’을 걸러내지

 

몸이 저의 백년감옥에 수감된

영혼에게 바치고 싶은 제주祭酒

시인을 팔고 싶은 시의 피와 눈물을.

 

 

그대 아직도 꿈꾸는가

 

 

 

 

연어치어를 따라서 바다로 가는 새끼붕어들 뒤에서 냇가 갯버들도 발버둥친다

 

초저녁별을 보고 뛰어오른 가물치가 꺾어진 갈대에 꿰여 몸부림치고 있다

 

파도 높은 날 바다에는 더 많은 날치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까치 몇 마리가 기러기 떼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난다, 거기서 함께 피서를 즐길 거란다

 

제비 몇 마리가 참새들과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초겨울 볕을 쬐고 있다, 텃새가 되려고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리 허연 가지 사이로 개나리와 철쭉꽃이 샛노랗고 새빨갛게 피었다, 겨울꽃이 되려고 그런다고 한다

 

제비꽃 한 무리가 폐농가 마당귀에서 오도카니 앉아 턱을 괴고 있다, 올봄에도 돌아오지 않은 제비를 기다리는 거란다

 

물고기가 되고 싶어 애쓰던 가마우찌새가 마침내는 물속을 헤엄치게 되었다고 한다

 

다람쥐도 산새처럼 날고 싶어 하다가 드디어는 하늘다람쥐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 용인문학 15호 수록)

 

 

유안진196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첫 시집『달하』를 비롯하여 『봄비 한 주머니』『다보탑을 줍다』『거짓말로 참말하기』『알고(考)』등 14권의 신작시집과 『세한도 가는 길』등 다수의 시선집 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