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식민지 외 2편
식민지 외 2편 / 박정대
캄캄한 밤
잉크처럼 찍어 쓰고 싶은 밤
멀리 있는 당신 멀리 있는 생
나는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유령일 뿐
차가운 공기가 피부처럼
모든 걸 말하고 있는 밤
나는 다다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단지 허공을 떠도는 유령일 뿐
고독은 제국의 식민지처럼 넓어
솔라리스 행성의 밤은 깊다
당신은 낯선 이국의 방언으로
누군가에게 또 사랑을 속삭일 테지만
자유도 저항도 반동도 사라진
여기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웃음과 식은 사랑을 파는 점령지
당신이 말하는 사랑은 여기에 없다
담배연기만이
생의 유일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타오르다 쓰러져 수북이 쌓이는 밤
공장의 늦은 불빛들만이 반짝이는 밤
차가운 공기가 심장처럼
모든 걸 말하고 있는 밤
천사 컨트롤 Z
어느 순간부터를 삶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부터를 시라고 해야 하나, 삶도 시도 쓸쓸하게 바람 부는 오후면 나는 고요히 컨트롤 Z를 눌러 본다
*
유령들의 회합이 있던 날 밤 월훈은 약속의 반지처럼 밤하늘에 높이 떠 있었는데, 옆집 옥상 난간에 걸린 금석맹약의 반지를 나는 자정이 넘도록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잘 자라는 인사 한 마디 없는 무정한 세상의 밤을 자욱한 안개만이 들짐승처럼 떠돌고 있었는데, 내가 염탐하고 궁구했던 지상의 유일한 그대는 또 어느 지붕 아래서 까무륵 잠이 든 걸까, 깊은 밤 옆집 옥상 난간에 걸린 달의 구멍을 보네, 그것은 환하고 멀어 내가 닿을 수 없는 세상, 원래 나 태어난 곳도 외로운 구멍이었으니, 오늘은 허공에 금빛 반지 하나 걸어 놓고 나 쓸쓸한 알몸으로 잠드네, 밤새 바람이 너를 만질 때면 꿈속에서 나는 너를 잊으리(컨트롤 Z)
*
나는 내가 없어서 좋았네, 사랑이 끝난 후에도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도 나는 내가 없어서 좋았네, 화려한 꽃들을 입고 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도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근원의 바람이 지나가는 거리에서도 별들은 철없이 수억 광년 궤도를 돌며 빛을 보내왔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볼 두 눈이 없어서 좋았네, 나는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없어서 좋았네, 강퍅한 인간의 대지 위로 전염병 같은 상념들이 떠돌 때에도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나뭇가지 우듬지마다 새들이 날아와 그들의 생을 노래할 때도 나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으니, 감각 이전에, 생 이전에 나 그렇게 있었으니, 나는 내가 없어서 좋았네, 멸절하는 인종의 고뇌와 멸치떼의 집단 자살 같은 유영도 사무치는 빛의 그 어떤 근원도 나를 발견할 수 없었으니, 그대가 나를 발명하기 전, 시골길을 달리는 낡은 버스의 툴툴거림처럼, 풀썩이며 떠오르던 몇 알갱이의 먼지처럼(컨트롤 Z)
리스본, 대칭의 별 세 개, 응용된 코드의 저녁
― 짐 자무시 1∼67중 일부
각각의 숏들을 연결시키면 영화가 된다
그대와 내가 적어나가는 시도 마찬가지다, 매순간의 고독이 끝내 한 생의 얼굴을 이루듯, 사물의 상태는 끊임없이 유동적이다, 媒質도 없이, 사물들은 스스로의 에너지 변화를 통해 자신만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암전으로 분리된 67개의 행성과 고독의 시가 될, 것이다
1
<Birds>에서 술 취한 새들이 노래하는 저녁, 나는 탁자의 모퉁이에 당도한 낡은 행성의 저녁빛을 보네, 창밖은 가끔씩 낙엽들의 암전, 시인, 작가, 드러머로 이루어진 밴드가 콘서트를 여는 여기는 핀란드의 밤, 돌고래 쇼를 보러가자
2
파리의 어두워지는 저녁이었네, 나는 소르본느 대학 근처 어느 카페에서 잠 자무시의 인터뷰집을 읽고 있었지, ‘어떻게 보면 이 행성은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죠. 예를 들어 대화라든가, 누군가와의 산책, 또는 구름 한 점이 지나가는 방식, 나무 이파리에 떨어지는 빛, 또는 누군가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일’, 책갈피가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내 내면의 페이지들의 암전, 여기는 파리의 밤, 누군가와 담배를 피우러 가자
3
이면지에 쓴 시처럼 어슴푸레한 저녁이 오고 시인은 눈을 감고 기타를 치네, 기타를 칠 때마다 별들에 불이 켜지고 그래서 밤은 시인들의 행성, 기타 연주가 끝나면 다시 암전될 여기는 행성의 내면, 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러 가자
4
내 컴퓨터의 이름은 <리스본 7월 24일 거리>, 나는 그 거리로 스며들기 위하여 한 대의 담배를 피우고 세 개의 모음과 네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암호를 치네, 가끔씩 갈매기들이 대서양의 녹색 별들을 물고 날아드는 여기는 리스본의 밤, 그대의 낮은 숨결이 내 귀에 와 닿을 때마다 아아 나는 암전, 대서양주점으로 술 마시러 가자
5
눈 내리는 밤, 불꽃의 내륙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눈보라의 음악, 문풍지 한 장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적어나가는 방 안의 작은 혁명사, 누군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잠든 함경도의 깊은 밤, 시린 유성이 하나 휙 빗금을 긋고 지나가면 봉창문은 이미 착색판화, 바람이 불 때마다 비사표 성냥곽 같은 마을 전체가 흔들리는 여기는 바람의 북방한계선, 시베리아 호랑이들이 더 깊은 숲속으로 몸을 이끌고 들어가 눈동자의 불을 끄고 잠들면 다시 암전, 여기는 내면의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얗게 내리는 천사들의 밤
6
자무시, 그대는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비밀결사조직 회원이랬지, 하긴 비밀결사조직의 이름이 평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프리메이슨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몇 개의 비밀결사조직, 가령 시로 암호를 타전하는 요원들,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동지들, 그러니까 가령,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또 다른 점조직, 영혼의 세포
7
아프리카, 내 관념 속 마지막 대륙으로 그대는 떠났다, 나는 여기에 남아 대륙붕의 심장에 관하여 혹은 북극곰의 새로 돋는 발톱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각한다, 심장 속 빙산의 일각이 북극곰의 발톱에 긁힐 때면 나는 남아 있는 자들의 고독과 말없이 돋아나는 상처의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각한다, 하나의 행성 속에서 그대는 여름을, 나는 끊임없이 겨울을 살고 있다
8
시는 무척 추상적이고, 무척 부족적이에요, 오직 시인의 부족 구성원들만이 그 언어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나의 부족에 관하여 생각해본다, 나의 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내가 아는 몇 마리의 구름과 바람, 그런 것들이 하나의 부족을 이루었으니, 오늘 같은 날은 <베를린 프로펠러 아일랜드 호텔>에 투숙하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프로펠러를 달고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나의 부족을 만나고 싶어, 바람과 구름의 부족
9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뜨거운 차를 마시고 덥혀진 몸으로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대하여, 덜컹거리는 창문과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겨울 야간열차에 대하여, 대륙을 횡단하는 생에 대하여
10
사물의 상태, 내가 만지고 쓰다듬는 사물의 상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물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모든 사물들은 뜨겁고 동시에 차갑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정렬하는 것이다, 내가 밤에 당도한 것이 아니라 밤과 내가 지금 여기에 당도한 것이다, 그냥 당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꾸었기에 지금 여기에 내가 고요한 사물의 상태로 당도해 있다
11
담배연기로 사색을 한다, 담배연기로 항해를 한다, 참 많은 유령들의 시간이 지났다, 퇴근할 시간이다, 많은 것들이 변형되고 더 많은 것들이 추가될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우라를 부정하고 마후라를 목에 휘감고 펄럭이며 퇴근할 시간이다 (다음 호에 계속)
(2010년 용인문학 15호 수록)
박정대|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아무르 기타』『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