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손목의 견딤
손목의 견딤 / 이은규
누군가
기다림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해, 중얼거렸다
어떤 선언은 비인칭 시점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발자국은 자꾸 그늘 쪽으로 향하고
생장점을 지닌 기다림은 식물의 상상력과 알맞다
고요수목원 부채파초 앞에 서면
허공은 부채와 파초 사이, 한 점 바람을 헤아리고 있다
부채모양의 파초 잎, 잎들
이 식물의 숨은 내력은
줄기에 빗물을 모아 한 모금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
기다림의 손목 대신 파초줄기를 잘랐을 발자국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구원에 목말라 할까
그럴수록 두 눈의 水位만 높아질 뿐,
종종 길 잃은 발자국에게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는데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잎의 습성 때문이다
방향을 잃기 위해 떠도는 영혼이라면 소용없을
부채파초의 흰 꽃말은 기다림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부채가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라는 냉정
그는 고백과 헤어짐의 문장을 파초 잎에 적어 보냈다
기다림,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하는 것
떠난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은
비인칭 시점의 선언과 감행만큼 가깝게 멀다
생장을 거듭하는 시간만 그늘 쪽으로 한 뼘 더,
월간 『현대문학』 2009년 9월호 발표
이은규 시인
1978년 서울에서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8년 《동아일보》 시부문에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