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결빙의 순간을 보았다
결빙의 순간을 보았다 / 김윤배
- 시경재시편 57
보지 않았어야했을 너를 보았다 며칠째 수은주가 내려박히더니 자작나무숲이 얼었다 천의 빛깔로 몸빛 바꾸어 산 그림자 달뜨게 했던 너를 알고 있어 젖가슴에 쉬이 손 넣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내 손에 수천 개의 금이 그어졌다 너는 가늘게 눈 흘겼지만 잔물결로 내게 안기는 네가 좋았다 네 물빛 어룽대며 흔들리던 자작나무숲 흰 그림자 밀어낼 때 나는 네가 머지않아 몸빛 버릴 것을 알았다 차령산맥 밀어내고 구름 소떼들 밀어내고 바람의 발자국 밀어내고 마침내 네 몸 속 부드러운 물결에 숨겼던 천의 칼날 밀어내는 너를 보았다 칼날이 뿜어내는 푸른빛으로 내가 잘려나갔다 너는 수면에 솟아오른 칼날로 투명하고 차가운 침묵의 유리 사원을 세웠다 유리 사원 광장에는 너를 밟고 간 사내들의 발자국들 무수히 찍혀 있었다 발자국마다 사내들 멀고 먼 회귀의 지도 낡아 갔다 돌아갈 수 없는 날개들의 무덤이기도 했다 네게로 들던 무수한 유랑의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 유랑의 수만 마일을 날아온 철새들, 유리 사원의 광장에 시린 한 발 오래 들고 있다
계간 『신생』 2009년 가을호 발표
김윤배 시인
194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 인하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86년 《시문학》 및 《세계의 문학》 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등과 산문집 『시인들의 풍경』, 『최울가는 울보가 아니다』, 평론집 『온몸의 시학 김수영』, 동화집 『비를 부르는 소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