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을 주는 시 한 편 - 77 ㅣ나의 고아원ㅣ안미옥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 77 ㅣ나의 고아원ㅣ안미옥 | ||||
| ||||
-->
나의 고아원
안 미 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불우(不遇)’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불우라는 말을 남의 것으로만 알고 산다.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이란 사전적 의미를 우린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불우, 하면 불우이웃돕기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나이 30~40대를 넘긴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정이리라. 그런데 이 나라의 산업화가, 자본의 글로벌화가 정말 저 불우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일까? 불우란 말은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들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가 된 것일까? 행복지수란 게 있다. 한 나라의 국민들 다수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나라 정치가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밥 먹여주고, 병든 노인 돌봐주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개인의 노력 여부와 상관없는 국가의 책무이다. 개인의 가난과 불행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 능력의 부재로만 덮어씌우려는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낮게 나타난다. 능력이 없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상위 1%만 밖으로 드러난 빙산을 떠받치는 건 물속에 잠긴 나머지 99% 하층이란 걸 알아야 한다. 아, 그나마 예술가는 ‘싹이 나는 감자’ 같은, 싹둑 도려내 버리고 싶은 불우를 양식으로라도 삼을 수 있으니, 이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 박후기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