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시 읽기- 이진숙 추천] 안영선_만월(시와소금 2013년 겨울호)
[이 계절의 시 읽기- 이진숙 추천] 안영선_만월(시와소금 2013년 겨울호)
만월滿月
안 영 선
낙과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농협의 체납 이자도 많아졌다 대형마트의 낙과 할인판매는 바자회 혹은 선심성 자선행사처럼 화려했다 그들은 또 다른 이윤 만들기에 바빴고 나무상자 채 가득 쌓아놓은 낙과 옆에는 열대과일이 엠보싱 용기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과일 좌판을 따라 현수막이 걸렸다 현수막에 그려놓은 홍옥이 과수원 김 씨의 얼굴처럼 붉었다
과수원 옆 비탈에 쑥부쟁이가 피기 시작했다 트랙터가 출하를 앞둔 질퍽한 배추밭을 갈아엎는다 녹아내린 배춧잎의 알싸한 군내가 최 노인 댁 무밭으로 옮겨가는 트랙터 바퀴에서 출렁거린다 트랙터 뒤를 쫓는 최 노인의 걸음이 저녁노을처럼 붉었다
봉제선 위로 만월이 고개를 든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13년 가을호
■ 시 읽기
제1회 ‘문학의 오늘’ 첫 신인상 작품이지요. 이제 등단의 절차를 밟은 안영선 시인은 오랫동안 왕성한 시작활동을 해온 중고 신인입니다. 그의 시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리 삶의 질곡을 상처 받은 이웃, 소외된 이웃으로부터 읽어냅니다. 등단작 「수목장」 「새」 「갯벌」 「더덕북어」등은 그러한 안영선 시인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들입니다.
「만월」은 과수원 김 씨와 배추밭 최 노인을 통해서 우리 삶의 현실을 질타합니다. 대형마트의 할인 이벤트는 성대하지만, 빚으로 농사를 짓고 이자조차 감당할 수 없는 과수원 김 씨의 얼굴은 이벤트의 현수막에 그려 놓은 홍옥처럼 붉습니다. 같은 붉은 색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른 것이지요. 무밭을 갈아엎어야 하는 최 노인의 걸음 역시 저녁노을처럼 붉습니다. 시인은 과수원 김 씨와 최 노인의 붉은 얼굴과 붉은 걸음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의 뜨거운 피도 붉게 요동치고 있었을 테니까요.
얼마 전 우리 동네에도 새로운 슈퍼마켓이 문을 연다고 하여 가 보았더니 대형마트의 체인점이었습니다. 이렇게 동네 구석구석까지 대형마트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면 영세 자영업자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으나 결국 저는 그 대형마트의 체인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해도 우리는 저마다 바쁘고 자기 살 길 찾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지그시 먼 달이나 바라볼 수밖에요. ■ 이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