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쓰는詩
수평으로 걷기 - 안영선
안영선
2014. 3. 31. 23:25
수평으로 걷기
안영선
신발장에서 구겨진 구두 하나를 꺼낸다
낡은 표피를 따라 차곡차곡 쌓인 시절
상흔처럼 누렇게 얼룩져 있다
광택 잃은 거죽엔 우시장에 끌려가던 짐승
그 애절한 울음이 묻어 있다
거칠었던 도로의 이면을 따라
내 보폭의 길이를 재던 튼실한 뒷면
낡은 걸음에 휘청대는 날이 잦았던 요즘
서서히 지워지는 이 중년의 걸음에
아내의 반짝이는 구두가
팔짱을 끼듯 기대어 있다
때론 익숙한 걸음일수록
밑창을 갈아야 함을 알았다
수선공의 손에 수평 잃은 밑창이 잘려나가고
기우뚱한 생도 한동안은 반듯할 것이다
교체한 밑창이 만드는 새로운 걸음의 한 보폭
이제 아내가 팔짱을 풀어도
나는 수평의 한 시절을 걷는다
(계간 <시와시>, 201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