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헌 시인의 日刊_시 읽는 아침]-수평으로 걷기 /안영선
안영선 시인의 시 '수평으로 걷기'
주영헌 ・ 2020. 8. 7. 7:10
수평으로 걷기 / 안영선
신발장에서 구겨진 구두 하나를 꺼낸다
낡은 표피를 따라 차곡차곡 쌓인 시절
상흔처럼 누렇게 얼룩져 있다
광택 잃은 거죽엔 우시장에 끌려가던 짐승
그 애절한 울음이 묻어있다
거칠었던 도로의 이면을 따라
내 보폭의 길이를 재던 튼실한 뒷면
낡은 걸음에 휘청대는 날이 잦았던 요즘
서서히 지워지는 이 중년의 걸음에
아내의 반짝이는 구두가
팔짱을 끼듯 기대어있다
때론 익숙한 걸음일수록
밑창을 갈아야 함을 알았다
수선공의 손에 수평 잃은 밑창이 잘려 나가고
기우뚱한 생도 한동안은 반듯할 것이다
교체한 밑창이 만드는 새로운 걸음의 한 보폭
이제 아내가 팔짱을 풀어도
나는 수평의 한 시절을 걷는다
안영선, 『춘몽은 더 독한 계절이다』, 천년의 시작, 2020, 39쪽
아내와 저와의 관계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습니다. 매일 보는 사람이고,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하니 시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저와의 관계에서 다르지만, ‘달라서 더 어울리는 관계’를 발견했습니다. 정말로 많이 다릅니다. 외향성의 아내와 내향성의 저.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저. 아내가 불을 상징한다면 저는 물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한없이 더 멀고, 한번 멀어지면 되돌릴 수 없겠지만, 아내와 저는 퍼즐을 맞추듯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신발장에서 화자는 시인과 시인의 아내를 떠올린 것 같습니다. 팔짱을 낀 것처럼 나란한 신발을 보면서요. 제가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까요, 우리 집은 신발장이 넓고 아내와 저는 다른 신발장을 이용합니다. 제 신발은 아이들의 신발과 함께 있습니다. 신발은 크고 거대해서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가 셋이나 되다 보니 아이들 신발이 가득하고 제 신발은 허우대만 멀쩡한 신발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리저리 치이는 것이 제 일이죠.
이 시를 읽으며, 제 신발을 아내 신발 옆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신발을 옮겼다가는 구박을 받겠죠. 자기 신발 놓을 자리도 없는데, 왜 신발을 옮겨 놨냐고. 서정과 현실은 다른 법입니다. 가끔 아내를 바라보면 가슴이 심쿵하여 그렇다고 말을 하면, 다 늙어서 뭔 주책이냐고 말합니다.
안영선 시인의 시집
요즘도 같이 길을 걸을 때면 손을 잡고 걷습니다. 아내 손의 따뜻함을 느낄 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손에서 땀이 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끈끈함이겠죠.
이 시를 읽으며 아내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웃는 얼굴이 예쁜, 운전할 때 끼어드는 차에 화내는 모습도 귀여운 당신. 오늘 제가 너무 팔불출 같은 얘기만 써 놓은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됩니다.
시를 읽는 아침 오늘의 문장
시 쓰는 주영헌 드림
[출처] 안영선 시인의 시 '수평으로 걷기'|작성자 주영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