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세계의 나무들
김호기
1-乾期의 나무들
건풍에 허공이 말라가는 시간이 있는 곳
빠르지 못해 오래 도망가는 거북이, 등에 붙어있는 잎
어느 바람이 뒤집으면 오래 버둥거리는 각질의 잎
바람이 거느리고 있는 낯모르는 수족들과
딱딱하게 굳어진 쥐들이 떨어지는 나무의 외곽
화석처럼 이름 모를 짐승들의 뼈가 부서지는 곳 그곳,
계절이 없는 나무는 아무 곳에서나 서서 잠을 잔다
건기의 바람이 맨몸으로 흔들린다.
맨몸의 바람이 숨어들면서 숲은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지 못한 눅눅한 바람은 움트지 않았다
건기의 땅에는 한 번쯤 바람을 타고 배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이 있다
2-雨期의 나무들
원주민의 알싸한 요통이 강물에 비린내를 푼다.
나무들이 버린 폭우.
편지를 쓰던 펜촉의 허리가 열대림의 우기를 머금은 듯 휘어져 있고
토착어들은 죄다 구부러져 있다.
물총새가 토템폴에 물고기를 내리칠 때. 푸른색의 활자들에서는 나무가 자라난다. 새의 토템을 깎을 땐 반드시 이름이 없는 나무여야 새가 날아가지 않는다. 카누가 지나가는 강가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들로 분주하고 길은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밀려났다. 인간을 숭배하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는 살아있는 쥐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3-구름나무
오래전 푸른 지능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내려다보는 연체의 종족은 어느 밤, 죽은 나무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고 한다.
오랜 역설의 시간을 올라 구름이 되고 싶은 푸른 엽록의 지능
반짝이는 수많은 걸음을 허공으로 다 날려 보내고
대신, 구름의 흰 잎을 얻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무들의 후생에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한다.
허공에도 傳說이 있다면 모두 나무가 키운 것들이다
< 당 선 소 감 >
때론 한 통의 전화가 잠들지 못한 생각들을 교차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주 멀거나 가까운 인연들을 곁에 있어도 그 곁이 외롭게 보인다
나를 위로하던 외로움 나는 처음으로 나의 태생에 대해 고백했었다
마야코프스키의 "나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동자처럼 고독하다"라는 시구를 보고 그날 밤을 내내 울었다
모르겠다 아직도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 못하겠다
너무나 많은 과오의 눈물이 왼팔에 기록됐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 죽음 환각과 악몽 그 속에서도 시가 생존할 수 있었다니 경이로울 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거느리고 곧잘 잃어버리고 돌아서며 주머니를 뒤지곤 했다
몇 개의 계절을 풀어도 계절은 계속 윤회하고 있다
활자들을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국 편지는 부칠 수 없어 주소를 모두 먹어버렸다
지금은 쓰지 못하는 그러나 꼭 쓰고 싶은 내게 "정말로 좋은 시인이 될 거라고 믿어"라고 말해주었던 죽음과 가까웠던 나를 다시 살게 해젔던 이름
만날 수 없는 윤회가 너무 멀다
< 약 력 >
1989년 경기도 출생
현재 경운서당 수학중
hsvk4@hanmail.net 010-2839-1456
< 심 사 평 >
김호기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소개한다. 김호기의 시에서 눈에 띤 것은 파현화된 이미지의 연결이었다. 파편적 글쓰기는 이 시대의 중요한 흐름인 바, 자유자재로 분출하는 욕망과 분열된 자아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파편적 이미지들을 어떻게 전체 구조에 잘 녹여 내느냐이다. 그런 면에서 김호기의 시는 이미지들의 연결이 다소 거칠과 생경하게 드러내는 점이 아쉽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김호기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젊은 패기가 있고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뛰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바람이 그린 초상화는 언제나 색이 칠해지지 않았다”라든가, “바람이 죽음을 파먹으려 허공을 맴돌았다”와 같은 표현은 그의 시적 감수성을 잘 드러낸다 할 수 있다. 또한 [다만 바람은 시든 두 겹의 눈꺼풀을 똑, 따서는 후하고 불어버릴 뿐이었다], [구름침대], [슬픔중독자]등 시의 제목을 뽑아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김호기는 아직 젊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개성을 좀 더 과감하게 드러낸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바람’을 시의 중심 모티프로 사용한 작품들이 대다수인데 다양한 시적 모티프를 끌어와야 할 듯하다. 또한 일상성을 도입하여 삶의 구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주눅 들지 말고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무궁한 발전이 있기 바란다. (강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