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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69

안영선-텃밭 사용 설명서 텃밭 사용 설명서 안영선  먼저 겨우내 잠든 땅을 깨워주세요계절은 오 분 간격으로 알람을 울립니다알람이 줄기차게 울린 후 졸음에 겨운 봄은 기지개를 켭니다땅이 눈꺼풀을 걷어 올리면 향내가 납니다습한 기운을 따라 호흡기로 스미는 저 냄새애써 봄 향기라 부릅니다텃밭 옆에서 겨울을 난 두엄을 쏟아붓고괭이로 적당히 섞어줍니다다음은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주세요굼벵이가 나와도 놀라지 마세요왕지렁이가 나오면 반갑게 웃어주세요흙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이제 두둑을 따라 씨앗을 뿌리면 되는데요즘은 모종을 심기도 합니다뿌린 씨앗 절반은 까치 참새 몫이고심은 모종 절반은 고라니 몫이라 생각하세요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감자나 땅콩 수확이 적어도 화내지 마세요땅속을 싱싱하게 지킨 두더지 몫입니다배추벌레가 보이면 활짝 웃으며 맞아.. 2024. 6. 11.
안영선-텃밭 가꾸기 텃밭 가꾸기 안영선 그것은 숭엄한 장례일지도 모른다 생기 잃은 영혼을 위한 정갈한 의식 봉분마다 하관을 준비하는 땅이 열리고 무심하게 던져진 영혼 위에 뿌려진 흙은 묵언 중이다 틈틈이 영혼의 숨결을 살피러 온 고라니 사이 꽃마리, 강아지풀,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방동사니, 들깨풀, 중대가리풀, 개비름, 닭의장풀, 개망초, 질경이, 조뱅이, 뽀리뱅이…… 애꿎은 것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땅속에서 문드러진 씨감자는 자신의 낡은 육신을 다 내놓고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한참의 시간을 흘린 불면의 궤적 지상을 뚫고 나오는 저 연록의 생을 환생이라 불러도 될까 2023. 7. 24.
이름과 얼굴 사이_안영선 이름과 얼굴 사이 안영선 그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나는 도저히 그를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날카로운 눈꼬리를 가졌고 넓은 이마는 그만의 독특한 표지다 어울리지 않는 초점을 놓친 퀭한 눈빛만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구조적 장치다 거리두기 카페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얼굴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의 오뚝한 콧등이 나를 설레게 한다 인중을 따라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저리 영롱했었나 그는 언제부터 멋진 미소를 지녔을까 더러는 가려졌을 때 더 익숙한 것이 있다 미치도록 설레는 그의 환한 얼굴이 한없이 한없이 낯설어지는 건 팬데믹 시대를 사는 서러움 같은 것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과 얼굴 사이에서 정신이 혼미하다 - 2021년 [화성작가] 2호 - 2021. 12. 4.
어느 강사의 하루_안영선 어느 강사의 하루 안영선 오늘도 7시 50분이면 출근을 한다 나는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 손 소독하세요 - 자가 진단하셨어요 - 한 줄로 서 주세요 나는 아침부터 지독한 세상과 대치 중이다 중국 유명 대학 출신이라는 것 한때 잘 나가는 중국어 강사였다는 것 나의 화려한 이력은 팬데믹 뒤에 슬며시 숨어버렸다 시급 만 원, 주당 14시간 4대 보험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코로나로 나의 일상은 사라졌지만 오늘도 나의 일상은 코로나와 동행 중이다 화장실 손잡이, 교실 창틀 손이 닿는 곳마다 입안을 맴돌던 중국어 낱말은 잊힌 기억처럼 하나씩 닦여 나갔다 - 니하오 이 짧은 한마디도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데 오늘도 소독약 냄새에 취한 생이 코로나 속에서 간신히 간신히 버티고 있다 - 2021년 [화성.. 2021.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