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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69

로봇으로 살아남기_안영선 로봇으로 살아남기 안영선 내 이름이 사라졌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가 팬데믹을 선언하던 날 성당에서 바코드 하나가 문자로 도착했었다 바코드가 없으면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도 동봉되었다 미사 직전 성당 입구는 바코드 찾기로 소란스럽다 자원봉사자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처럼 능숙하게 바코드를 찍던 기억이 난다 계산대에 올려진 상품 다루듯 순간, 내 몸도 감성을 놓은 물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열 화상기 앞을 지나 세상과 마주한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신체가 다양한 색으로 채워지는 순간 모니터 요원은 내 머리 위에 쓰인 숫자를 기계처럼 읽는다 개인 식별 표식인 QR 코드를 화면에 대자 접종 완료 정보와 14일 경과 정보도 친절하게 확인해 준다 빅데이터에 정보를 제공해야 출근도 하고 밥도 먹을 수.. 2021. 12. 4.
소쇄원瀟灑園_안영선 소쇄원瀟灑園 안영선 대숲 사이로 하루가 기울고 있다 창계천을 거슬러 올라 소쇄원 원림에 들면 담장 밑으로 시월의 하늘이 맑게 흐른다 제월당 대청마루에 눕자 회화나무 잎이 날아와 나란히 눕는다 광풍각 맑은 바람이 제월당 달빛을 따라 분다 바람이 기둥을 돌아 나갈 때면 처마 끝 풍경風磬은 다시 살아나곤 했다 풍경風景을 따라나서는 저 맑은 숨결은 상흔傷痕에 대한 치유일지도 모르리라 소쇄처사는 이 절절한 치유의 시간을 알까 소쇄원 맑은 바람 속에서 밤이 잠들고 있다 - 2021년 [포에트리 아바] 5호 - 2021. 11. 28.
월하정인月下情人-안영선 월하정인月下情人 - 어느 사내의 독백 안영선 저 달이 완전히 사라지면 좋겠어 당신 눈에 흐르는 내 눈물 감출 수 있으니까 당신 손을 꼭 쥐면 내 심장도 떨리겠지 순라군*이 오기까지 이 황홀한 떨림을 즐길 거야 저 달이 희미해질 때까지 당신 손 꼭 쥐고 있을 거야 오늘 밤은 당신과 함께 춤을 춰야지 오직 당신을 위한 나를 위한 춤을 출 거야 저 달이 희미해질 때까지 당신과 함께 춤을 출 거야 당신 체온은 내 몸으로 뜨겁게 뜨겁게 스며드는데 이 밤 당신과의 언약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두려워 차라리 저 달이 완전히 사라지면 정말 좋겠어 이런, 달이 자꾸 커지고 있어 초저녁에 뜬 둥근 달처럼 * 조선시대 도둑이나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하여 밤에 궁중과 도성 안팎을 순찰하던 군인. 2021. 10. 3.
랜선 여행_안영선 랜선 여행 안영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걸었지 햇살이 바람을 질러가기 시작했어 바람 사이 그림자가 빗물처럼 부서져 내렸지 부서져 내린 그림자 곁으로 늦은 오후가 터벅터벅 따라 걸었어 지상에 남은 발걸음 소리는 저녁노을처럼 물들었지 노을은 몽롱한 언어를 뱉기 시작했어 뱉어낸 언어는 너무나 이국적인 색깔을 지녔지 검푸른 허공이 등줄기를 따라 별을 쏟아 냈어 별의 들판에서 야고보는 얼마나 혹독한 일상을 견뎌 왔을까 터진 신발 틈에서 핼쑥한 순례자 얼굴 하나가 삐져나왔지 순례자는 청춘을 가래처럼 뱉던 아버지를 닮았어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지 나를 깨운 건 안데스를 힘겹게 오르던 라마였지 라마는 내 손을 꼭 쥐고 있었어 그렁그렁한 눈에는 태양이 들어와 앉았지 태양의 시간은 경사면을 따라 휘청대기 시작.. 2021.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