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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69

그림자 지우기-안영선 그림자 지우기 안영선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꽃의 참수는 소리 없이 진행되었고 튤립은 풍차처럼 맴을 돌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남도의 한 섬에서는 유서도 쓰지 못한 유채가 화산재 사이에 매장되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만행이었기에 어쩌면 화려한 순교일지도 모른다 허락받지 못한 약속이었기에 흔한 생흔 하나 남기지 못했으리라 혹한의 강을 건너온 계절이 뒤엉켜 지금 이 시간 꽃은 할당된 거리만큼 땅속으로 이격 중이다 한 철 봄은 뜨거운 침묵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바람이 솔솔 침묵 속으로 분다 이 침묵 속 이생과 후생의 거리는 예리한 빛의 양날일지도 모른다 빛의 이면을 따라 그림자가 선명할수록 꽃의 참수는 화려하고 수난의 간극은 더 멀어진다 수군대던 꽃 그림자가 땅속에서 숨이 죽을 때쯤 나는 꽃과 사회적.. 2020. 6. 10.
손바닥 체온계-안영선 손바닥 체온계 안영선 중앙 현관에 열화상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지 바이러스를 잡는 렌즈는 파수꾼처럼 우릴 감시했어 렌즈 앞을 지날 때마다 모니터에는 수많은 얼굴이 담겼지 판결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정말 긴장할 수밖에 없어 화면에 비친 얼굴 위로 수감번호처럼 숫자가 새겨졌지 카메라는 냉혹하게 우릴 두 집단으로 분류하기 시작했어 어떤 이는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어떤 이는 인적이 드문 공간으로 유배되었지 봄날의 하루는 이리도 서늘하게 시작되었어 어린 시절 얼음을 지치다 돌아오던 날이 기억나더군 그때는 늘 기침을 달고 살았지 그런 날이면 빨간 볼을 비벼주던 어머니는 치마에 손을 닦고 이마를 짚어 주곤 하셨어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유년의 온도를 재곤 하셨지 체온을 손바닥으로만 기억하던 어머니는 차가운 물수.. 2020. 6. 10.
만의사萬儀寺 가는 길 - 안영선 만의사萬儀寺* 가는 길 안영선 작년 이맘때 무봉산 한 자락에서 주거를 시작했다 만의사로 향하는 길목이었을 선납先納재** 불공을 드리려 길게 늘어섰다던 절박한 꿈의 길목에선 소작농의 흥건한 체온도 사라졌다 고라니 몇 마리가 아파트 울타리까지 내려와 풀을 뜯는다 한 가족쯤일 .. 2019. 12. 14.
新몽유도원도 13 - 안영선 新몽유도원도 13 - 병상記 안영선 무딘 생의 마디를 도려내는 일이야 고단한 생이 뼈와 뼈 사이 촘촘히 박혀 있었지 갈기갈기 찢긴 슬관절 반달연골 속 지나온 이력이 선사 동굴 벽화처럼 차곡차곡 새겨져 있었어 벽화 속에는 눈비 내리던 밤의 유년과 열정으로 울분을 토하던 청춘, 부지.. 2019.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