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지우기
안영선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꽃의 참수는 소리 없이 진행되었고
튤립은 풍차처럼 맴을 돌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남도의 한 섬에서는 유서도 쓰지 못한 유채가
화산재 사이에 매장되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만행이었기에
어쩌면 화려한 순교일지도 모른다
허락받지 못한 약속이었기에
흔한 생흔 하나 남기지 못했으리라
혹한의 강을 건너온 계절이 뒤엉켜
지금 이 시간
꽃은 할당된 거리만큼 땅속으로 이격 중이다
한 철 봄은 뜨거운 침묵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바람이 솔솔 침묵 속으로 분다
이 침묵 속 이생과 후생의 거리는
예리한 빛의 양날일지도 모른다
빛의 이면을 따라
그림자가 선명할수록 꽃의 참수는 화려하고
수난의 간극은 더 멀어진다
수군대던 꽃 그림자가 땅속에서 숨이 죽을 때쯤
나는 꽃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 2020년 [문학의오늘]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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