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쓰는詩

그림자 지우기-안영선

by 안영선 2020. 6. 10.

그림자 지우기

 

안영선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꽃의 참수는 소리 없이 진행되었고

튤립은 풍차처럼 맴을 돌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남도의 한 섬에서는 유서도 쓰지 못한 유채가

화산재 사이에 매장되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만행이었기에

어쩌면 화려한 순교일지도 모른다

허락받지 못한 약속이었기에

흔한 생흔 하나 남기지 못했으리라

 

혹한의 강을 건너온 계절이 뒤엉켜

지금 이 시간

꽃은 할당된 거리만큼 땅속으로 이격 중이다

한 철 봄은 뜨거운 침묵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바람이 솔솔 침묵 속으로 분다

이 침묵 속 이생과 후생의 거리는

예리한 빛의 양날일지도 모른다

 

빛의 이면을 따라

그림자가 선명할수록 꽃의 참수는 화려하고

수난의 간극은 더 멀어진다

수군대던 꽃 그림자가 땅속에서 숨이 죽을 때쯤

나는 꽃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 2020년 [문학의오늘] 여름호

'내가쓰는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을 읽는 아침-안영선  (0) 2020.06.10
新몽유도원도 14-안영선  (0) 2020.06.10
손바닥 체온계-안영선  (0) 2020.06.10
만의사萬儀寺 가는 길 - 안영선  (0) 2019.12.14
新몽유도원도 13 - 안영선  (0) 201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