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쓰는詩69 달팽이 - 안영선 달팽이 안영선 달팽이 두 마리 다정하게 저수지 둘레길을 걷고 있다 더듬이 눈은 거리를 재는 줄자처럼 탄력적이다 전진의 느릿한 방향을 가늠하는 나침반이다 청춘의 한때 저 느릿한 여유가 부러운 적도 있었다 일정한 보폭은 일정한 거리만 허락한다 온몸으로 지면을 밀어야 하는 운명임을 알았을 때 저 느릿한 몸짓이 여유로움의 착시라는 것도 알았다 달팽이는 눈에 그린 도착점을 위해 두려울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행여 발에 밟힐까 가슴 조이며 조심스레 느린 기억을 쫓는다 무거운 멍에를 지고 나르는 저 모습 흡사 시지프스를 닮았다 무거운 바위를 언덕 위로 굴려 올리는 고달픈 형벌, 바위는 정점에서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고 시지프스는 정점을 향해 다시 바위를 굴릴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형이 주.. 2020. 7. 19. 안영선 - 소나무 장미 소나무 장미 안영선 학교 울타리에 소나무 장미가 활짝 피었다 초록에 싸인 붉은 숨결은 해그림자 따라 늘어진 심장을 설레게 한다 지난 오월, 계절은 송홧가루처럼 몽환스럽게 내렸다 몽롱이라는 한 절기가 흐르던 시절 송홧가루 취한 장미는 소나무를 한껏 안았으리라 서로의 가시를 포개는 황홀한 떨림 더러는 애틋함이 가슴에 꼭꼭 박혔으리라 붉은 핏방울이 봉오리처럼 송골송골 맺혔으리라 붉게 흐른 눈물이 고여 생흔이 되고 그 상처는 허공에 붉은 별이 되었다 별에서 태어난 꽃 공생의 시간이 하늘가에서 맴을 돈다 더운 바람이 시샘하듯 톡톡 건드려 보지만 가시로 맺은 굳은 언약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 [용인문학] 34호(2020년 상반기호) 2020. 7. 19. 목련을 읽는 아침-안영선 목련을 읽는 아침 안영선 나무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무는 싱싱한 눈으로 햇살을 읽는다 싱싱한 햇살이 나무눈에 흥건하다 햇살 속에서 태양의 울림은 투명하게 소거되었다 아침마다 소거된 음이 환하게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린 소리는 차곡차곡 꽃눈을 만들 것이다 꽃눈이 만든 꽃봉오리가 촛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타오른 꽃이 햇살 위로 뚝뚝 흐를 것이다 아침이 목련을 읽고 있다 바람이 나뭇결에 새긴 흔적을 더듬는다 한 계절이 흔적 앞에서 주춤거린다 사월 오후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고 있다 오늘도 목련은 그날처럼 묵언 중이다 목련이 아침을 읽는다 아침이 목련을 읽는다 아침은 묵언 중이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2020년 [불교문예] 여름호 2020. 6. 10. 新몽유도원도 14-안영선 新몽유도원도 14 - 혹한記 안영선 생의 무게는 질량이 아니라 촉감이래요 아버지는 사는 것이 늘 차가운 바람 같다 했어요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감기몸살에 떨고 있었지요 가난의 무게는 빈 쌀독이 아니라 문틈으로 들어오는 싸늘한 냉기라고 했어요 구의역은 2교대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 출근길이었지요 어느 날 이틀 만에 돌아오는 아버지 손에는 스크린 도어에 새긴 한 청년의 소식이 들려있었지요 아버지는 봄 한 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정규직에서 비껴간 촉감의 변주곡이라 했지요 누군가에겐 사계절이 아닌 한 계절만 있다 했어요 아버지의 사계절도 늘 혹한기 속에만 숨어 있었지요 아버지는 오늘도 그 혹한의 끝을 찾아 헤매고 있어요 봄이 오면 혹한의 생도 살랑살랑 도화 향기 속에서 아른거리겠지.. 2020. 6. 10. 이전 1 2 3 4 5 6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