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노래
- 만해 한용운 -
안 영 선
교과서에서 만나는 한용운
처음 교단에 나와 중학교 3학년 국어를 가르치던 1991년의 일이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날이었음에도 초임 교사라는 딱지를 떼지도 못하고 긴장 속에서 조심스레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단원은 ‘만해 한용운’.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한 남학생이 손을 들고 말한다.
“선생님, OOO이 선생님을 위해서 시를 외웠데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 초임 교사의 새빨개진 얼굴을 무색하게 하듯 한 여학생이 일어나 한용운의 대표시 <님의 침묵>을 외우기 시작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중략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리던 기억이 마치 영상처럼 떠오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여학생은 시를 외우느라 밤을 꼬박 세웠고, 덩달아 외운 시를 확인해 주느라 그의 동생도 함께 밤을 세웠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험에 단골이었던 <님의 침묵>을 외우며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생소한 용어들을 정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용운의 전기문 속에서도 인용되어 있던 시였기에 그 사건 이후 한동안 ‘만해 한용운’의 단원을 공부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시 <님의 침묵>을 외워 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던 기억이 난다.
만해 한용운은 단 한 번도 중학교 국어교과서를 떠난 일이 없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님이 쓴 전기문인 <만해 한용운>을 비롯하여 대표작인 <복종>, <나룻배와 행인> 등이 교과서의 단골 손님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복종>을 동요인 ‘과수원길’ 악보에 붙여 노래로 불러보기도 하고, 한용운이 말하는 ‘임’의 의미를 찾는 열띤 토론을 벌여보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가장 많은 문학비와 유적이 남아 있다. 생가와 사당, 시비와 동상이 있는 충남 홍성을 비롯하여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의 고택인 심우장, 시인과 부인이 함께 잠들어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 중앙불교학교의 후신인 동국대학교의 만해광장과 시비,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를 하며, 후에 시집 <님의 침묵>을 완성한 설악산의 백담사와 오세암, 은둔지와 집필처로 알려진 경남 사천의 다솔사, 시비가 건립되어 있는 서울의 탑골공원과 천안의 독립기념관, 대전의 사정공원, 구례의 화엄사 입구, 부산의 보광원, 그리고 최근에 조성된 백담사 옆의 만해마을과 남한산성 내에 있는 만해기념관, 한용운이 순회한 전국의 사찰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짧은 글 속에 한용운 시인의 많은 유적지를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시집 <님의 침묵>의 산실인 내설악의 백담사, 고택과 묘소가 있는 서울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글에서는 한용운의 출생지인 충남 홍성을 향해 답사길을 떠나려 한다.
홍성에서 만나는 시인의 흔적들
충남 홍성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한다. 고려말의 명장으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청렴과 충절의 상징이 된 최영 장군과 단종에 대한 충절로 사육신의 지조와 절개를 보여준 매죽헌 성삼문이 홍성군 홍북면 출신이다. 한용운의 생가와 가까운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노예를 해방하고 항일투쟁에 참여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이 또한 홍성 출신이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의 기개가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홍성이니 충절의 고향이라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 싶다.
홍성은 이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면 홀연히 일어나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려한 선열의 얼이 고을마다 스며있는 고장이다. 만해 한용운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시인이요, 불교를 혁신한 승려요, 학자였다. 홍성에 서려있는 만해 한용운의 숨결을 따라간다.
홍성 나믈목을 빠져 나와 40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갈산면소재지가 나오는데 한용운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도로인 2번 군도를 따라가야 한다. 도로 입구에는 한용운 생가와 김좌진 생가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들길을 따라 달리면 김좌진의 생가와 기념관이 나온다. 한용운 생가는 이곳에서 다시 승용차로 10분 정도를 더 가야하는데 좌우로 펼쳐지는 포근한 산세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초가을의 풍경이 익어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성곡리는 인적이 드문 다소 외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이곳을 찾아오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기기 훨씬 전이었으니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안내판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같은 길을 맴돌다 한밤중에야 비로소 생가를 찾았는데, 인적 없는 산골에 던져진 일행은 급한 데로 생가 앞마당에 텐트를 쳐 잠자리를 만들고, 생가의 우물을 길어 목욕을 하고 밥도 지어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마당에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본 밤하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참 많이 변했다. 일단 생가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어려움이 없고, 공원처럼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시인의 생가가 외롭지만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시도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된 생가의 모습은 처음 방문하던 1992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잡은 생가에서 시인의 굳은 지조와 절개가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싸리나무로 곱게 울타리를 조성한 것이며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배롱나무의 빛깔 고운 꽃송이가 시인의 옥같이 맑은 심성과 고향마을의 포근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앞마당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본다. 십여 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우물 옆에 놓여있는 두레박으로 힘껏 물을 길어 올려본다. 아직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 두레박에 달려 올라온다.
1992년에 처음 복원이 된 생가는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옥의 규모가 매우 작다. 툇마루 위에는 심우제(尋牛齊=마음을 찾아 가지런히 함)라는 당호와 전대법륜(轉大法輪=진리는 머무르지 않고 변함)이라는 만해의 글씨가 편액으로 달려 있어 눈길을 끈다. 툇마루의 가운데 기둥에는 한용운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문패가 걸려 있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다. 마루에 걸터앉아 벽에 걸린 시인의 작품을 읽어본다. 방문 옆에 나란히 걸려 있는 액자에는 시 <님의 침묵>이 정갈한 글맵시를 자랑한다.
생가를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돌면 언덕 위에 지어진 한용운 시인의 사당인 만해사를 만나게 된다. 만해사는 1992년에 시인의 생가를 복원한 후 성곡리 일대를 성역화하기 위해 1995년에 홍성군청이 조성한 사당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한용운 시인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며, 굳은 의지에 찬 영정의 모습에서 시인의 고귀한 삶을 되짚어 본다. 사당 앞에는 <공약 3장>비가 세워져 있다. 최남선이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다는 조건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자 화가 났던 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더 강력하게 보완하기 위해 공약 3장을 추가하게 된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ㅣ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지 最後의 一刻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지 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 <公約三章>비의 전문 -
손끝으로 비문의 내용을 따라 읽어가자 한용운 시인의 애국심과 독립 의지가 손끝에 묻어난다. 한 평생을 조국 독립에 바친 시인의 마음을 되새겨 보며 만해사에서 발길을 돌린다. 사당의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 쪽으로 향하는데 생가 앞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제법 통일된 의상까지 갖춰 입을 것을 보니 무슨 청소년 단체 쯤 되리라.
생가의 옆에는 시비 <나룻배와 행인>이 있다. 검은 오석에 새겨진 <나룻배와 행인>은 상실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쓰여진 시인의 대표작인데 반공기념비에서나 볼 듯한 볼품 없는 시비가 오히려 시의 내용을 퇴색시키지나 않는지 걱정이 앞선다. 마치 지자체의 홍보물처럼 급조된 느낌에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보통 시비는 서예가의 글씨를 담는 것이 상식인데 이 시비는 컴퓨터의 한글서체인 신명조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옥의 티가 되고 있다. 실제로 김영랑의 생가에서는 볼품 없는 시비가 답사객들의 항의에 밀려 철거된 경우도 있다.
홍성군청에서는 한용운의 생가와 사당이 있는 이곳에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이상화․정지용․윤동주․이육사․신동엽․김수영․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에 활동한 민족시인 20명을 선정하여 시비공원을 조성하고 문학체험관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시비공원은 생가 옆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길섶에 조성된다고 하는데 문인들과 전문가의 조언을 얻어 멋진 시비공원이 탄생하기를 기원해 본다. 문학체험관과 시비공원이 완성되어 많은 문학 지망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면 홍성은 최고의 문학 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결성면 성곡리의 한용운 생가를 떠나 시인의 동상이 있다는 홍성읍 남장리을 찾아간다. 홍성읍과 광천읍을 잇는 21번 국도 옆에 있는 동상은 언덕에 있어 쉽게 눈에 띄며, 충렬사와 나란히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 이 만해 동상은 1985년 12월에 세워졌는데 만해 한용운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고 군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만해한용운선사상’은 한용운 시인이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으로 왼손에 독립선언서를 쥐고, 오른손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형상인데 금방이라도 조국 독립에 대한 일장 연설을 토해낼 것만 같다. 동상의 아래 부분에는 날개처럼 좌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1988년 전국 국어국문학 시가비 동호회가 세운 것이다.
홍성읍의 남산공원에 있던 한용운의 시비 <알 수 없어요>가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결성면으로 옮겨졌다. 지자체의 문화 사업의 일환일 것이다. 과거에는 홍성읍에 있는 홍주성 유적을 돌아보고 남산공원으로 오르면 문화원 뒤편에 있는 시비 <알 수 없어요>를 만날 수 있었다. 혜산 박두진 시인의 글씨로 쓰여진 시비가 지친 발걸음을 잠시 머무르게 한다. 섬세한 시어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겨나는 이 작품은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 등의 자연과 자연이 빚어내는 현상을 통해 절대자인 ‘임’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임’을 향해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정진의 모습이 풍겨나는 시이다.
한용운의 시비 옆에는 역시 이 고장 출신으로 구항면 마온리에서 태어나 국문학연구에 일생을 바친 나손 김동욱의 문학비가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이 문학비 역시 박두진 시인의 글씨로 쓰여져 있는데 두 문학비의 글씨체가 전혀 달라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시대가 다른 문학인의 문학비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최근 홍성군에서는 이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를 중심으로 성역화 작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 만해체험관을 건림했다. 체험관 앞을 지키는 만해선사의 흉상이 인상적이다. 전시관에는 선생의 유물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답사객의 발길을 글고 있으며, 학생들의 다양한 체험학습이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되어 찾는 이가 늘고 있다.
이 외에도 홍성에서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추모비와 손곡 이달의 시비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이달은 서자로 태어나 뛰어난 학식을 지녔으면서도 불우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허균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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