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문학순례길을 걷다]
2012년 08월 13일 (월) 09:04:02 용인신문 iyongin@nate.com
테마여행이 새로운 코드로 부상하고 있다. 기존 여행의 형태가 주로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이야기가 있는 여행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각 자치단체에서는 다양한 도보여행 코스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제주의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리산의 둘레길, 서울 성곽길 등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용인도 도보여행길 만들기에 정성을 쏟고 있다. 용인시는 올해 조성하고 있는 ‘걷고 싶은 명품 보도길’의 명칭을 ‘용인 너울길’로 확정하고 6월 준공을 목표로 추진해 왔다. ‘용인 너울길’은 용인시의 대표 명소와 녹지축을 연결해 역사와 문화, 자연 생태를 어우르는 명품 산책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심곡서원~조광조묘역~천년약수터~서봉사지~손골성지(11km)’ 코스, ‘양지 남곡리~은이성지~와우정사~미리내성지~청정학일아름마을(13km)’ 코스, ‘연미향 농촌체험마을~둥지박물관~구봉산~MBC드라미아(9km)’ 코스 등 모두 3개 코스로 선보였다. 필자는 여기에 문학 관련 유적을 돌아볼 수 있는 ‘용인 문학순례길’을 추가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문학순례길, 하나|
약천 선생을 모시고 목월을 만나다
- 비파담에서 휴양림, 용인공원묘원으로 이어지는 순례길
안영선(용인문학 편집주간)
비파담 만풍에 물들다
▲ 처인구 모현면 비파담 전경.
용인 문학순례길 1코스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문학적 삶이 깃든 비파담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파담은 용인에서 광주 쪽으로 흐르는 경안천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모현면 갈담리(자연부락명 파담) 옆으로 제법 하천이 넓어지는 곳이다. 약천 선생의 별묘가 있는 곳에서는 약 700미터 남짓 떨어져 있으며, 약천 선생이 우산정사를 짓고 생활하던 정자모탱이(자연누락명)에서는 불과 100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다. 이 비파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은 약천 선생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비파를 연주하며 자연 풍광을 즐겼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는데, 울창한 숲과 강물을 따라 유유히 나는 백로의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한다. 특히 강 건너편의 기암괴석과 불게 물든 가을 단풍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잘 어우러져 ‘비파담만풍’으로 불리며 용인팔경 중 제7경으로 손꼽힌다.
▲ 약천 남구만 선생 별묘.
비파담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갖춘 고풍스런 한옥이 있다. 파담로 91번길 24호. 이 한옥은 약천 선생이 기거하던 우산정사를 복원하는 의미로 지은 건물로 비파담의 맑은 풍광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복원한 고택에서 별묘(모현면 파담로 70)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별묘에 들어서면 시가비(詩歌碑)가 있는데 앞면에는 선생의 대표 시조인 ‘동창이 밝았느냐’가, 뒷면에는 한시인 ‘放琵琶潭偶吟’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강릉대 장정룡 교수의 말을 빌려 시조의 배경이 용인의 장사래 고개가 아닌 강원도 약천동의 장전(長田) 발낙재를 더 유력한 곳으로 설명하고 있어 안타깝다.
▲ 최근 새로 단장한 약천 남구만 선생 묘역.
선생의 묘소가 있는 초부리 묘역까지는 약 1.6km.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시간이 더 허락된다면 갈담사거리에서 모현성당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야트막한 고개가 장사래 고개로 시조의 배경이 된 곳이다. 초부리 하부곡 마을의 묘역 입구로 들어서면 신도비와 문학비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산길을 따라 10분 남짓 오르며 둔봉산 중턱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묘소도 최근 후손들에 의해 새롭게 정비되었다. ‘동창이 밝았느냐’로 시작되는 국민 시조와 900여 편의 시문을 남긴 문학가로서의 삶과 파란만장한 정치적 삶을 살았던 약천 선생에게 있어 용인은 고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이후 여러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지만 용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곳은 없다. 용인은 중년 이후 대부분의 삶을 산 곳이며 영혼의 안식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만나는 시비공원
▲ 모현면 자연 휴양림 안에 있는 시비.
용인자연휴양림은 약천 선생의 묘소에서 약 2.4km 거리에 있어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남짓에 도착할 수 있어 좋다.
이곳 휴양림에서는 용인에 연고가 있는 작고(作故)한 문인들의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용인시에서는 용인자연휴양림을 조성하면서 조경 사업의 일환으로 모두 열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시비공원을 조성했다. 매표소를 지나 가마골 통나무집 앞에 이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채제공의 문학비이다.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시와 수필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선생이 용인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은 묘소가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5번지 낙은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언덕길을 따라 몇 걸음 더 오르면 통나무집 사이로 초애 장만영 시인의 시 「달·포도·잎사귀」를 새겨 놓은 시비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목월 시인의 문학비 「나그네」를 만날 수 있다. 두 시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적인 세계관과 전통적 정서는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인의 만남.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장만영 시인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박목월 시인은 모두 초부리에 있는 용인공원묘원에 잠들어 있다.
▲ 모현면 자연 휴양림 안에 있는 노작 홍사용 시비.
휴양림의 중심 건물인 숲속체험관 앞 넓은 잔디마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여러 개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포은 정몽주의 문학비 「단심가」를 시작으로 노작 홍사용의 문학비 「나는 왕이로소이다」,허균의 시비 「명연」, 남이 장군의 시비 「북정가」,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유서가 새겨진 문학비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대표적인 개혁정치가로 알려진 정암 조광조의 문학비 「절명시」, 한국 여성 최초의 독일유학생으로 먼 이국땅에서 인식과 실존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치열한 청춘을 살았던 전혜린의 문학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만난다. 특히 홍사용 시인은 용인 출생 1920년대 나도향,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여 우리 문학사의 지평을 넓혔으며 감상적이고 향토적인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모현면 자연 휴양림 안에 전혜린 기념비.
용인공원묘원으로 가는 길
용인자연휴양림에서 용인공원묘원까지는 약 한 시간 남짓이면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45번 국도가 있는 초현삼거리를 향해 약 1.7km 정도 내려오다 보면 초부로 54번 길에서 초하로로 이어지는 길을 만난다. 다시 이 길을 따라 약 1.5km 정도를 더 걸으면 용인공원묘원으로 이어지는 새래로 길을 만나는데, 여기에서 500미터를 더 직진하면 용인공원묘원의 관리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다.
▲ 용인공원묘원 안에 있는 소설가 이범선을 기리는 표석.
공원묘원 관리사무소에서 가장 가까운 이범선 소설가의 묘소는 관리번호가 가5-886호이다. 선생의 묘소는 도로 옆에 인접해 있고, 입구에는 작은 안내 비석이 있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작가 학촌이범선선생지묘’라는 묘비와 함께 화강석으로 봉분을 곱게 두른 선생의 묘소를 만난다. 1982년 한국문인협회와 한국크리스찬문학가협회에서 세운 묘비 뒷면에는 첫 창작집 『학마을 사람들』의 후기 일부를 기록해 놓았다.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서는 등 뒤로 소설 「오발탄」에서 “가자! 가자!” 하고 외치던 실성한 어머니의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 용인공원묘원 안에 있는 문학박사 고 양주동 묘역.
국문학자로 알려진 양주동 박사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은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대한의 남아로 태어나 군 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힘든 군사훈련 끝에 해질녘의 노을을 바라보며 부르는 이 노래에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래서일까. 박사 양주동이 아닌, 시인 양주동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시인 양주동의 묘소는 가-8지구에 있다. 문학박사 양주동, 아니 시인 양주동의 영원한 안식처가 용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용인은 큰 자랑거리를 얻은 셈이다. 그 호탕함과 자신감 뒤에 숨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해마다 우리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 것이다.
▲ 용인공원묘원 안에 있는 아동문학가 이원수 묘역.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의 묘소는 양주동 박사의 묘소와 같은 지역인 가-8지구에 있다. 양주동의 묘소에서 위쪽으로 약 50미터 정도 더 오르면 아담하고 소박한 합장묘(관리번호 가8-816호)를 만나게 된다. 평생을 어린이와 함께 살다 간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그의 아내 최순애(아동문학가)가 함께 잠든 묘소이다. 선생이 16세가 되던 1926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고향의 봄」은 이원수의 대표작인 동시에 문단 생활을 이끈 등단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동시는 1929년 홍난파가 곡을 붙여 아이들뿐만 아니라 국민 동요로 널리 불리고 있다. 아리랑과 견줄 만큼 민족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고향을 등지고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 용인공원묘원 안에 있는 시인 박목월 묘역.
박목월 시인이 용인공원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묘소는 용인공원묘원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만 묘원의 관리 대상이 아니다. 박목월 시인의 묘소가 있는 지역은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공원묘원과 사유지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철조망이 순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문화를 지키는 것은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과거 지자체의 안일한 문화 정책으로 인해 작가들의 묘소가 유족들에 의해 이장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4년 후면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된다. 물론 출생지인 경주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겠지만 시인의 영원한 안식처인 이곳 묘역에서도 박목월 시인을 기리는 조촐한 행사가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용인공원묘원 안에 있는 시인 장만영 묘역과 시비.
문학순례길 1코스의 종착지는 장만영 시인의 묘소이다. 관리번호는 가3-450호. 공원묘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3지구의 정상 부분에서 시인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장만영 시인의 묘소가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75년 10월 급성췌장염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후 벽제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82년 6월에 이곳 용인공원묘원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김억의 추천을 받아 《동광》지에 「봄노래」와 「마을의 여름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시작한다. 장만영 시인의 묘소에는 묘비 대신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1983년 7월, 생전에 문학 활동을 같이 했던 문우인 김경린, 김광균, 구상, 박태진, 송지영 등이 고인의 8주기를 맞아 건립한 것이다. 문우들의 애잔한 마음이 듬뿍 담긴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길손」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시인 장만영, 그는 길손처럼 그리운 벗들에게 편지 한 장 남겨놓지 않고 떠나갔지만 달과 포도, 잎사귀를 사랑했던 순수한 마음은 황혼녘에 붉게 빛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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