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_책
이은봉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오랜만에 들린 통영에서도 보고 배울 책은 많았다
구중서 선생님과 통영에 놀러가서는 먼저 박구경 시인이 소개한 ‘호두나무실비집’이라는 책부터 읽었다
정가 2만 5천 원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지 않고 먹는 법이었다
빠른 리듬에 쫓기다 보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배가 불러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덕우 시인이 소개한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산 호텔 부속 횟집’이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이 책에는 첫 페이지부터 과식은 당뇨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 통영에서도 내내 괴로웠다
끝내는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내 오랜 병통, 통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작품, 이은봉 시인의「통영―책」입니다. 서두에서 시적 주체는 말하고 있지요.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이 문장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골똘하겠지요. 무엇이든 책이 될 수 있지만 독법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혹은 생성되는 책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벤야민은 독서란 씌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라는 새로운 독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 모든 만물이 책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겠지요. 시적 주체가 “보고 배울” 모든 것을 책이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은 책에 담긴 “진실 혹은 진리”보다,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는데 문장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을 실현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가 그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세계관 및 지향점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는 시적 주체의 마지막 문장은, 첫 문장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로 귀환 중. 투명한 여름 햇살 아래 세상에서 가장 긴 책을 펼치며. 이은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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