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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김명희] 송현상회

by 안영선 2009. 8. 4.

송현상회 / 김명희

 

 

 

1

해장을 놓친 바람 하나 궁시렁, 평상에 앉는다.

간밤에 새로 붙은 동백아가씨를 안고서

늙은 담장은 오랜만에 화색이 돌고

깨진 유리창 끝으로 햇살이 걸려 칭얼거려도

구멍가게는 아침이 늦도록 열리지 않는다

어제 읍내 솜틀집 다녀온 엄마가 혀를 차더니,

진구네 엄마 자랑하던 양은냄비 계가 깨진 걸까

 

2

새마을운동을 눌러쓴 동네 이장이

배급된 쥐약 몇 봉 들고 가게 입구를 기웃거린다.

하나 둘 모여든 아이들은 제 몫의 만화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반공방첩 담장 밑으로 고여 들고

겨울 태양은, 제 몫의 산아제한을 붙든 채

홀쭉해진 골목 끝으로 체적을 좁히는 삼거리 한낮

일그러진 반합과 탄통을 밀고 온 엿장수가 가게 안을

어슬렁 살핀다, 남은 꽁초만 비며 끄며 천천히 떠난다

뒷간 포비아 등은 대낮에도 한참을 붉게 흔들렸다

우리는 논 가운데서 참새 한 마리 더 허탕 친 후에야

버짐처럼 까칠한 가게 문이 열렸다

 

3

진구랑 진구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우리는 머리 위에서

뱅뱅 도는 미원과 미풍처럼 한동안 서로 눈만 껌뻑였다

그 후 나는 몇 번 더 아버지의 거북선 심부름에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고 그때마다 미원은 하얀 제 속을

겨울 햇살에 내어주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 2008년 《시와시학》가을문예 당선작

 

김명희 : 경기 양평 출생.

2006년 《한라일보》신춘문예 당선.

200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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