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田 / 주영헌
지난겨울 추위에 새싹을 뺏긴
빈 콩 쭉정이만 춘삼월을 조문하는 묵전
한 여름 푸른 그늘을 키웠을 담배 대공이 드문드문 폐가 기둥처럼 남아있다.
오래 전 이곳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꺾고 도시로 나간 누이들의 귀향을 마중하러
신작로까지 한걸음에 달음질치던
담배 순 만큼 푸른 아이들이 살던 그 때
아이들만큼 젊었던 밭은 한 계절도 쉬어 가지 않았다.
연초건조장이 이쯤에 있었고
담배 잎 푸른 연기가 자욱하던
아이들의 나이가 무거워지는 만큼 농자금도 무거워져
점점 굽어가는 등, 김씨는
신작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서도 처음은 밭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계절마다 곡식을 심다
겨울을 먼저 쉬고 가을도 쉬고
묵田 옆으로 묵村이 생겨났다.
반쯤 해동된 밭(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쪽에선 아직도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들
반쯤 타다만 담배 대궁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편 그늘이 잘 들지 않는 곳엔
또 다른 생을 막 살기 시작한, 김씨의
둥그런 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주영헌 :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시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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