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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박후기]-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by 안영선 2010. 10. 26.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박후기 

  - 어느 시인의 장례식

 

                                            

 

 

  죽음도 저장의 한 방식,

  땅 속이든 불구덩이든 온전한

  죽음으로 저장되기 위해서는

  뼈만 남아야 한다

 

  구릉의 무덤가 비석도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지워진 비문엔

  달랑 이름 석 자,

  그마저 흐릿하여

  음각에 고인 빗물이

  잠시 머물다 갈 틈 없다

 

  시인이 죽었다

  묵은 향이 뼈를 사르며

  절을 하듯 고꾸라진다

  죽은 시인의 시에서

  약 냄새가 난다

  시인의 향기만 남았다

 

  시구에 불 들어간다

  火葬場 전광판에 명멸하는 이름처럼

  시 또한 뼈만 남아야 한다

 

  화부가 시인의 뼈를 추스린다

  뼈만 남은 언어를 추스린다

  모든 수사가 사라졌을 때,

  죽음이 비로소 간결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계간 『신생』 2010년 봄호 발표   

  

 

 박후기 시인

 

 1968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내 마음의 무늬〉 외 6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2006)와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2009) 가 있음. 2006년 제24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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