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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

안영선-재떨이에 대한 단상

by 안영선 2011. 7. 23.

 

 

재떨이에 대한 단상

 

안영선

 

 

허공을 향해 일탈을 꿈꾸다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가 불꽃으로 타들어가는 입술

떨쳐 버리지 못한 언어의 유희적 잔재

아내의 잔소리에 상한 마음을 차곡차곡 털어댄다

 

재떨이엔 부정不淨으로 굳은 습관의 꽁무니들이

입김에 휘둘린 채 구겨져 있다.

가벼운 흰 연기가 다 빠진 나른한 하루가

끈적끈적한 진액으로 남아 있다

몇 해 전 아버지는 금연을 선포하고 재떨이를 닦으셨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 되어서야

편두통이 사라졌다는 아버지의 서러운 스무 살

후미진 하숙방에서 냉수를 들이키며 담배를 피우셨단다

시름이 따라 깬 새벽 누런 황 내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로 감싸며

수십 년을 그렇게 사셨단다

이제 아버지가 닦는 것은 끈적한 진액만은 아니다

수십 년 겹겹이 쌓은 시름의 얇은 막들을

성찰의 마음으로 하나씩 걷어내는 일이었다

 

세상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나이가 되면

나도 내 아버지처럼 찌든 재떨이를 닦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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