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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

512호 터줏대감 - 안영선

by 안영선 2014. 3. 21.

 

 

512호 터줏대감

 

안영선

 

 

그는

몸에

쇠붙이를

키웠지

 

무릎에서 낡은 솜틀기계 소리가 들릴 때면

나사 조임이 느슨해진 거라 말했지

움직일 때마다 마찰음은 더 커졌고

병실을 떠도는 매캐한 부유물은 햇살의 파장을 즐겼어

무료한 그는 새로운 환자의 방문을 기다렸지

먼지는 화석처럼 몽환 속에서 뽀얗게 지나온 시절을 되새겼어

 

삼십 년 전 서울 변두리에 중고 솜틀기계를 장만했지

씨앗을 도난당한 목화송이는

녹슨 기계 속에서 갈기갈기 찢기곤 했어

가게 앞 평상엔 불치환자처럼 솜뭉치가 쌓였지

불치의 기억은 원통에 둘둘 말려 가벼워졌어

가벼워진 생은 그의 처방을 떠나 재생을 기다렸지

 

낡은 기계가 휘청거리면 부품을 바꿔야지

덜컹대는 톱니바퀴에 기름칠이 더해지면

그의 마디마디에도 말랑말랑하게 연골이 채워졌어

녹슨 모터 늘어진 고무벨트가 교체될 때

조임 나사가 뼈를 지탱하는 철심의 버팀목이 되었지

솜틀기계는 낡아가고 그는 더욱 생생해졌어

 

512

병실

터줏대감

처럼

 

(계간 <시작>,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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