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여기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떠올려보면 어릴 적 우리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철봉 오래 매달리기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섬약한 문인이라면 통과의례와도 같았던 “폐가 아픈 일도/이제 자랑”은 아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젊은 시인. 어쩌면 “좋지 않은 세상에서” 충만한 것은 “당신의 슬픔”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땅이 집을 잃어가고/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매일 아침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이를 악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사랑은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한데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좋기도 하였”던 것이겠지요. 아껴놓은 슬픔인 듯 아닌 듯, 당신이라는 이름. 이은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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