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外界)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있습니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의 이야기인데요. “바람만을 그리는” 예술가의 고뇌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겠지요.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답니다. 숨겨놓은 마음들을 허공에 그려 넣듯.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답니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화가 그리고 그의 입.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으려는 화가가 있습니다. 언어의 미로를 헤매는 시인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네요. 놀랍게도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 혹은 ‘외계’에 두고 온 기억일지도. 이은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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