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모국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울먹울먹한 감수성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노래해온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펼칩니다. 오늘의 시는 포도나무 이야기. 모든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리하겠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지만, 그저 ‘사이’를 바라보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때도 있지요. 가을의 시국, 우리는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라는 물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있습니다, 라는 대답이 여기저기 들려오네요. 가을달이 지고 있는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름 불러야 하는지, 또 무엇으로 남아 현재의 시간을 비추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포도나무를 바라보는 뼈아픈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쓸하지만, 결연한 질문을 보태는 일이 슬픔의 힘을 마련해주리라는 깨끗한 믿음. 이은규 시인
'좋은詩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로 쓰는 편지-117ㅣ삽십 분ㅣ김상혁 (0) | 2016.12.12 |
---|---|
시로 쓰는 편지-116ㅣ거짓된 눈물의 역사ㅣ김중일 (0) | 2016.12.01 |
시로 쓰는 편지-114ㅣ꿈ㅣ신용목 (0) | 2016.11.23 |
시로 쓰는 편지-113ㅣ지상의 시ㅣ김현승 (0) | 2016.11.23 |
시로 쓰는 편지-112ㅣ백석역ㅣ최서진 (0) | 2016.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