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선 작|
심해어 외 2편
박형식
공중에 세 들어 사는 새들은 알까
수화처럼 무겁게 꾹꾹 눌러 담은 어둠을
깃털처럼 가벼운 소문은 절대 가라앉지 않지
물에 빠져 죽은 물고기들
그리고 사체를 유령처럼 뜯어먹고 사는
눈이 사라진 어류들
폐를 선물로 받은 생명체는 결코 가 볼 수 없는 곳
심해
원시의 밑그림
해조차 속 시원히 들어가 보지 못한 곳
한여름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도
노랗게 물든 잎사귀를 훑어줄 따스한 바람도 없고
한적한 구름도 머물지 못하는 곳
갑작스런 소나기 피할 수 있는 따스한 둥지도 없어
어미는 그 새끼를 애써 품어본 적이 없지
이빨이 피부를 뚫고 가시처럼 박힌
무시무시한 겉모습을 가진 괴물들과
이마에 등을 앞세우고 다니는 심해어
그리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생명체들
걔네는 아마 모를 거야
자신들의 그 끔찍한 몰골들을
목마른 옹달샘에 얼굴 비춰 본 적 없으니
어디 한 번 꽃단장이나 제대로 해 봤을까
햇살을 피해
천적을 피해
세상을 피해
어둠을 찾아
바위틈 한적한 은신처를 찾아
경쟁하듯 끝없이 파고 들어간 어둠의 헤픈 끝자락
어느새 머리부터 흐물흐물해져 몸은
가족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볼썽사납게 납작해졌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압에 고막마저 터져버려
알아들을 수 없는 네 목소리의 떨림도
더듬더듬 나는 알아
네가 정녕 어둠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
육지의 끝
아버지의 집은 육지가 끝나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 저 육지는 왜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바닷속으로 자꾸 뛰어들지요
해가 지면 능소화 그물처럼 팔을 뻗어
눈먼 바닷바람에 시달린 해송을 끌어안고
평소처럼 제멋대로인 파도는 고약한 성깔이 발톱으로 자라나
맨얼굴의 바위를 기어이 할퀴어 놓는다
소년은 흠 많은 바위틈에 갑각류들이 알 까놓는 소리를
아버지 코 고는 소리와 들으며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웬 놈의 빨판이 훤한 달빛을 짚어
바닷속으로 끌어내렸고
깜빡이는 집어등이 밤새 물소리에 잠겨 삐걱거릴 때
배들은 선착장에 손발이 묶여 마치 별빛 인양 일렁거렸다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피해
모래 알갱이 날리는 육지 끝이 펄럭이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각을 품고 떨어지는 육지는 바닷속에서 볼수록 더욱 장관이었다
아버지의 머릿결에서 소금 냄새가 났다
아니 바람이 소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있었다
나른하게 아버지가 소년을 잠자리에 누일 때까지
소년은 본격적으로 꿈꾸어야 했다
꿈꾸면 안 돼 누나의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잔잔해진 파도처럼 끼어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결처럼 바닷속을 왠지 알몸으로 유영하는 이물감에
자세마저 고쳐 잡을 수 없는 불편함으로 뒤척인다
밤새 소라가 품어놓은 파도 소리는
젖은 귓바퀴에 식은땀처럼 흥건하게 고여있다
갑자기 누나가 소년을 흔들어 깨운다
소년은 장롱에서 끄집어내진다.
새우등처럼 불편한 잠을 잤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저녁을 내오고
우리는 평소에 반도 먹지 못하고 저녁상을 물렸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
언제부터인가 누나와 소년은
제사 음식이 싫었다
집 마루까지 밀려온 파도 소리가
육지를 잠꼬대처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식물성 꿈
건조하고 바람마저 사나운 겨울밤이면 더욱 극성인 가려움증
잠결에 긁어대면 긁어댈수록 꽃가루처럼 일어서는 살비듬
살 내음 어디에도 꽃향기 깃들지 않고
온통 가려움 속에 잎맥처럼 뜯어놓은 혈관들은 모두 터져버려
기어이 살 속을 시뻘겋게 헤집어놓고야 만다
가려움이 깨어낸 꽃의 생존 본능
웃자란 손톱이 지난 자리마다 싹이 움트고
고통과 가려움을 구분하지 못해 혼동하는 사이
환각의 긴 심지는 축축하게 머릿속에서 엄한 다리만 연신 꼬아대기 바쁘다
손바닥이 경쟁적으로 훑은 자리마다 버짐처럼 창궐한 꽃밭 한가득
봄이 아닌데도 흩뿌린 곳마다 화사하게 꽃으로 응답한다
기어이 피부를 뚫고 일어서는 선홍빛 꽃잎은
온통 검붉은 꽃동산으로 쉽게 일가를 일구었는데
살갗이 두터운 팔꿈치를 벗어나 거뭇거뭇한 사타구니를 지나
금방이라도 터질 듯 온몸으로 충혈된 실핏줄이 쭉쭉 가지를 뻗는다
진한 향기가 어디 숨어있나 코를 가까이 가져가면
코끝에서 톡 쏘듯 온몸에 핏발이 곤두서고
마법사의 능숙한 손놀림처럼 기교를 부리듯 손끝이 닿으면
하늘까지 핏빛 낭자한 꽃 덩굴 천지를 아우른다
이제 막 개화한 꽃잎에 홍조가 머무는 듯 따뜻한 혈이 흘러들면
혈색조차 온화한 꽃무늬 도장 버짐처럼
어깨부터 시작해 넓은 등 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넓어지며 마구마구 찍어댄다
엷은 미소를 가진 꽃 몽우리 화사하게 손등에도 얼굴에도
오래된 흑백사진을 복원한 듯 그림처럼 감싸안은 꽃받침
턱밑까지 다복하게도 한 아름 제대로 피어오른다
그것으론 부족했을까 설태 가득 낀 혀끝에 미끄러지듯
꽃받침 한 짐 지고 결심한 듯 이제 막 들어선다
잔뜩 곤두선 신경에 마른침만 꿀꺽
약간의 수분기에 긴장이 풀린 꽃가루 한 사발 들이키면
그간 항생제에 의지해 잘 관리해 온 꽃가루 알레르기
조심스레 부어오른 편도선에 생채기가 올라오건 말건
씨방 하나 풀어 꽃가루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정말로 자폭한다 쿵 두근두근
심장이 중심부터 터져버릴 듯 숨죽이는 순간
투명한 피부를 찢고 징그럽게 드러난 뼈를 감아 돌며
억센 가지가 근육을 감아올려 휘감으며 침투한다
칼칼하던 목소리는 성대마저 섬유질 성분으로 굳어 점점 뻣뻣해지고
피부는 금세 나무껍질처럼 두터워져
어느새 눈꺼풀까지 이파리 한 장 차오르며 햇살을 막아선다
나뭇결 피부 주름은 잎맥으로 갈라져 조심스레 물길을 내고
귀청까지 올라선 물관에서는 밤새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어느새 자리를 잡고 물줄기 하나 틀어진 견실해진 뿌리는
보기에도 내딛는 걸음걸이 꽤 힘겨워 보이는데
드디어 여기다 싶었는지 엉덩이부터 털썩 주저앉아 자리를 제대로 잡는다
화창한 오후에 걸맞게 여느 식물들은 변함없이 정직하고 소박하기 마련인데
바람 같은 떠돌이 생활이 어지간히 지겨웠을까
햇살마저 따스하게 정착한 이곳에서 오래된 꿈을 지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끝내 식물로 진화한다면 생물학적 퇴보일까
연구하고 진보하는 생물학적 소통일까
어느덧 배고픔은 이미 잊은 지 오래
이제 갈증은 아래로부터 물관을 타고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당선소감|
박형식
시인은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통역사지요. 처음부터 입이 없거나 비록 입은 있지만 자신의 언어로 옮겨놓을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오역이나 오해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통역사는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는 언어들을 주로 선별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 오역이나 오해가 시이자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와 예술에는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고집스럽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오역이나 오해가 일방적이고 헐벗은 강요가 아닌 소통과 공감의 공간으로 환유 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여러 감정의 과잉과 결핍의 아슬아슬한 곡예의 외줄 위에 시와 예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고된 번역 작업은 보기엔 무뚝뚝한 무인에 가깝고, 더구나 공감 능력까지 좋지 못한 저에게는 처음부터 과분한 영역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시인이 되기보다 안될 이유가 더 많은 사람이지요. 그 예로 저와 시를 관련지으면 주변으로부터 대부분 안 어울린다는 말을 주로 듣는데, 아무래도 시라는 장르가 스스로 저와 거리두기를 하거나 제가 시에 몰입하는 시간이 짧고 얕음을 뼈아프게 지적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번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시와 문학에 대한 의문과 진로에 답을 찾지 못할 때, 당선 전화를 받고 제 스스로도 이제 시인이 된 거냐고 되물었던 것도 앞으로 제가 시인의 의미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아직 찾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어쩌면 사금을 캐는 외로운 노동자처럼 더욱 바지런하게 움직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상을 마련해주신 용인문학회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익숙해 잔뜩 주눅이 든 저의 부족한 글을 성장으로 선택해 주신 김윤배 선생님, 이경철 선생님, 손택수 선생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큰 감사 인사드립니다. 늘 곁에 있어 주는 아내와 아이들과 이 소식을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강원 원주 출생.
l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l 교육공무원.
l 저서로 『우리나라가 보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있음.
l 2024년 제7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
|심 사 평|
불만을 잠재우는 파토스와 원형적인 에너지
남구만신인문학상운영위원회
제7회 남구만신인문학상은 올해도 여느 신인상의 평균을 웃도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본심을 통과하였다. 그만큼 치열한 본심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심사위원들은 현실과 자아를 직시하거나 응시하면서 공허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육화를 기준으로 본심 진출작을 결정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김병숙(「상식의 힘에 대하여」외 9편), 박형식(「청이 인당수에 가다」외 7편), 박홍관(「그릇」외 6편), 윤보섭(「갈라파고스」외 7편), 최정민(「붉은 소금」외 10편). 이중 김병숙과 윤보섭의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검토 끝에 응모작들의 편차에 대한 아쉬움을 공유한 뒤 심사위원들의 기호가 두루 겹치는 박형식과 최정민이 최종심에 남았다.
최정민의 시는 사물과 인간의 익숙한 관계 설정을 재구성하는 시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것은 작고 연약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끈이었다. 그 끝에서 몇 번이고 튕겨 나갈 그가 운동장 너머를 꿈꾼다”고 노래한「그의 공」은 산문적 진술의 느슨한 나열을 아연 긴장케 하는 매혹으로 뭉쳐져 있다. 시와 산문의 경계를 자유자재하게 건너뛰는 활달한 솜씨에 기시감이 있는 비유들을 삼가면서 언어 경제의 더 날카로운 응축이 더해지길 기다려본다. 박형식의 시는 장황한 수사와 절제되지 못한 이미지 그리고 사유의 경직성으로 인해 선뜻 손이 가질 않는데도 불구하고 불만을 잠재우는 파토스와 원형적인 에너지를 쉬 떨쳐버리지 못하게 했다. 당선작「심해어」는 육지와 심해의 이분법적 구조, 다큐멘터리적 구성에 기대면서도 일상의 평균적 인식을 파고들어 깊이감을 주는 하강의 선 굵은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기성 시단의 흐름으로부터 거리를 둔 예외적 개성의 탄생을 예감케 하는 창조적 카오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험에 누군들 함께 하고 싶지 않을까.
장고 끝에 미끈하게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항아리에 찍힌 도공의 고유한 지문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문에 담긴 심장 박동음이야말로 항아리의 형식을 살아 있게 하는 우리 시의 미래에 더 가까이 있다는 판단이다. 시의 무의식 지대를 돌파할 심해어의 출현에 한껏 기대가 크다.
(심사위원_김윤배, 손택수, 이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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