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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박완호] 살구나무에게 묻다

by 안영선 2009. 8. 4.

살구나무에게 묻다 / 박완호

 

 

 

고백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살구나무는 고향집 대문 앞에 서서 흘러가는 가계家系를 지켜보고 있었네. 굽은 손가락으로 장맛비에 휩쓸려 땅바닥을 뒹구는 깨진 기왓장들을 주워 머리에 인 어머니, 꿈꾸던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너무 일찍 시들어버린 꽃이 떨어뜨린 마지막 잎의 비명이 퇴근버스 문틈에 낀 채 두꺼운 안개를 찢으며 울리던 새벽에도. 백곡의 발꿈치를 사무치게 건드리던 저수지 물살이 우두커니 서서 가닿지 못하는 먼 산등성이를 바라볼 때 열여섯 해를 알코올중독에 시달려 온 반백의 사내가 짧고 지루했던 생애를 접고 농약 냄새 퍼렇게 풍기며 산골짜기를 파고들던 저녁에도. 재를 두고 멀리서 사랑을 속삭이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 가운데 하나가 뿌리째 뽑혀나가던 날, 갈팡질팡 부는 바람 속을 내가 오갈 데 없이 걷고 있을 때에도 살구나무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소식을 들고 달려온 바람의 전언傳言을 듣고 있었네. 아직까지는 바람과 선이 닿지 않아 소식 깜깜인 채로 나는 집 앞 살구나무에 손바닥을 대고 지워져 가는 가계家系의 내력을 물으려 하네.

 

 

계간 『열린시학』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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