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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답사기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에 찾아가는 고향 - 이육사

by 안영선 2009. 8. 5.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에 찾아가는 고향

- 육사 이원록 -

 

  

안 영 선

 

안동에서 만나는 육사의 숨결


  이육사의 안동과 조지훈의 영양은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지리적으로 붙어 있다는 것도 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영남의 유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선비의 고장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종택과 같은 전통의 가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점이나 강직한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는 선비들의 삶이 문화 유산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는 점은 두 고장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될 수 있다.

  이번에는 조지훈의 영양에 이어 이육사의 안동을 찾아 나선다. 안동은 경북의 중심지 담게 규모가 제법 크다. 그러나 화려한 도심을 벗어나면 안동 역시 옛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전통 문화의 고장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이번 답사 일정은 시내 태화동으로 이전되어 있는 이육사의 생가를 시작으로 민속박물관 옆에 있는 시비 <광야>와 생가터인 도산면 원천리 일대를 돌아보는 것으로 삼았다. 원천리에는 생가터와 시비 <청포도>, <육우당유허지비>가 있고, 새로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왕모산을 바라보며 시인의 고향을 지키고 있다. 또 문학관 뒷산에는 1960년에 서울에서 이장한 이육사 시인의 묘소가 있어 부인의 묘와 나란히 누워 있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 나들목으로 나오면 안동 시내로 향하는 34번 국도와 연결이 된다. 이육사 생가는 시내 초입인 태화동 골목길 안에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는 않다. 생가는 안동공고를 지나 약 1㎞ 정도 가면 왼쪽으로 약수장모텔과 안동축협태화지소 사이의 작은 골목길 안에 있다. 골목길로 들어가서 작은 슈퍼를 지나면 낡은 철대문이 있는 한옥집이 나오는데 이곳이 태화동 672-9번지로 이육사의 생가가 옮겨진 곳이다. 안내판이 대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어 골목길에 들어서도 찾기가 쉽지는 않은데,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돌담이 있는 낡은 기와집을 찾아야 한다. 낡은 초록색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좁은 마당 안에 이육사 생가라고 적힌 작은 비석과 안내판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이 집이 원천리에 있었다는 내용과 1976년 4월 안동댐 건설을 위한 수몰지구가 되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이 집은 가옥 양식이 매우 특이한 홑처마에 일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안채와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역시 일자형으로 평행을 이루는데 안채와 사랑채의 칸수가 같은 것도 특징이다.

 

 

 

  나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안마당이 나온다. 이곳에는 이육사 시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인기척을 알리자 한 젊은 총각이 나와 시인의 친척이 된다면 인사를 한다. 사람이 살지 않았다면 금방 폐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육사 시인의 정신과 혼이 서려 있는 생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생가를 나와 시비 <광야>가 있다는 안동댐을 찾아 나선다. 34번 국도를 달려 법흥육거리에 이르자 왼쪽으로 안동댐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약 5㎞ 정도 지나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리인 월영교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월영교 위의 팔각정에 앉아 내려보는 안동댐의 모습은 장관이라고 한다. 월영교를 지나 좀 더 달리면 안동댐유원지로 들어가는 영락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 왕건 드라마 촬영장이 나온다.

 

 

 

  이육사의 시비는 안동민속박물관을 지나 민속촌 입구에 있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제막식을 가진 이 시비는 원래 안동 시내 낙동강 가에 세워졌던 것인데 도로를 확장하면서 이 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광야> 전문이 실려 있는 이 시비는 시인의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잘 담겨져 있다. 시비 뒤편으로는 야외 민속촌과 드라마 촬영장이 있고 나오는 길에는 안동민속박물관이 있어 함께 돌아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안동댐 유원지에서 도산면으로 가려면 다시 시내로 나가 35번 국도를 타야 하지만 영락교를 건너 우측으로 안동댐을 끼고 넘어가는 지방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다. 도로가 다소 좁기는 하지만 시골마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어 오히려 번잡하기 않은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그렇게 굽이진 고개를 넘으면 다시 35번 국도와 만난다. 35번 국도 상에도 많은 볼거리가 있다. 오천유적지의 멋스런 모습과 한국유학연구의 산실인 한국국학진흥원, 산림과학박물관 등이 반가운 손짓을 보낸다. 도산면사무소 앞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측으로 퇴계종택과 묘소, 이육사 시비와 묘소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나온다. 시비가 있는 생가터는 이 곳 삼거리에서 약 5.3㎞ 정도 거리에 있다.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있는 이육사문학관(http://www.264.or.kr)은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4년 7월 31일에 개관하였다. 2,300여 평의 대지에 조성된 문학관은 잔디밭과 연못, 오솔길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좋은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문학관 앞에는 원천리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생가터의 위치와 묘소로 가는 길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 처음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문학관의 주변에 조성된 공간은 마치 공원을 거니는 것처럼 아늑함을 준다. 문학관 건립과 함께 세워진 시비는 두 개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넓은 자연석 위에 또 다른 자연석을 얹어 만들 시비에는 대표작 <절정>이 새겨져 있으며 이육사 시인이 넓은 자연석 위에 앉아 책을 읽는 동상을 만들어 놓아 색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시인 옆에 나란히 앉아 본다. 시인의 따스한 숨결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시인의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관 주변에는 청포도 샘과 생가 모형인 육우당이 실물과 똑같이 복원되어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시인의 흉상과 벽에 새겨진 시 <광야>이다. 그리고 2층 벽에 타일공예로 만들어진 청포도 그림과 시. 잘 정리된 시인의 생애와 가계도, 독립 운동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시관, 여러 곳에서 출판된 시인의 시집, 서예나 시화 작품으로 만들어진 시인의 작품들, 이육사의 육필 원고와 사진이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을 느끼게 한다. 1층에는 세 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제1전시실은 육사의 생애, 제2전시실은 육사의 문학세계, 제3전시실은 육사의 독립운동 등의 테마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2층은 기획전시실과 영상실, 시인의 작품을 탁본해 볼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상실에서는 이육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어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문학관을 나와 이육사의 묘소가 있다는 뒷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문학관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는데 1시간이 좀 넘게 걸린다고 한다. 묘소를 찾는 사람이 많으냐는 질문에 별반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관과 생가터만 방문하는 것 같다. 얼마를 걸었을까. 더운 날씨에 거친 숨소리가 목을 타고 올라온다.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여기저기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 반갑게 느껴진다. 중간 중간에 화살표만 그려 놓은 안내판이 있기는 하지만 화살표 밑에 남은 거리라도 표시해 준다면 좋을 텐데……. 사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야 했다. 한참을 올라 능선에 이르니 작은 연못 하나가 나타난다. 잠시 휴식을 하며 바람결에 땀을 씻어본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걸으니 드디어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시인의 묘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오르게 했다. 묘소 입구의 소나무에 걸린 목판 시비 <청포도>가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 <청포도> 중에서 -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와 북경을 떠돌다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는 시인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낀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멀리 시인의 고향 마을을 바라본다. 낙동강 줄기 너머 공민왕과 그의 모후, 그리고 노국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는 왕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천리 생가터는 문학관에서 약 300m 거리에 있다. 생가터에서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몰지구로 지정되면서 태화동으로 이전된 생가를 대신하여 생가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3년 세운 <육우당유허지비>와 <청포도>가 새겨진 시비만이 시인의 흔적과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포도알 모양의 크고 작은 조형물 위에 비석을 얹고 시인의 얼굴과 시를 새긴 시비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세련된 멋을 느끼게 한다. 시비 옆에서 한껏 폼을 잡고 사진을 찍어본다.

 

 

 

  답사를 마치며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다. 수몰지구로 물에 잠겼던 생가터는 흙을 돋우어 지대를 높였기 때문에 이제는 물에 잠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좀 더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있다면 도심 속에 흉물스럽게 서 있는 생가가 되지 않도록 생가터로 옮겨와 보수 작업을 통해 복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07년 《용인문학》11호, 2008년 《경기교육》여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