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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답사기

선운사 동백꽃이 그리운 시인의 방황 - 서정주

by 안영선 2009. 8. 5.

선운사 동백꽃이 그리운 시인의 방황

- 미당 서정주 -

 

  

안 영 선

 

미당 서정주 시인을 만나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자화상(1939년)> 중에서 -


  시인 서정주는 2000년 12월 24일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전날, 노환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그는 꽤 장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60여 년의 긴 문학 생활 속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한국 문단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수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시인으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화로운 삶을 누렸다.

 


 

  내가 처음 미당 서정주 시인을 만난 것은 1982년 5월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동국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교생 문학콩쿠르에 참가하여 수필 부분에서 입상을 하게 되었는데 서정주 시인이 시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위대한 시인을 직접 만나는 영광이 당시 내게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작은 키에 온화하면서도 강한 눈빛을 지닌 분으로 기억된다. 60대 후반의 고령에도 힘찬 목소리로 문학 강연을 들려주시던 시인의 모습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아련하다.

  당시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국화 옆에서>와 <추천사>를 외워 선배들에게 검사를 맞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순수 문학과 친일 문학의 풀리지 않는 끈


  서정주 시인의 죽음은 그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극단적인 평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1천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며 천부적인 언어 감각으로 한국적이고 원초적인 서정을 담아낸 순수서정시의 주인, 해방 이후 젊은 제자들을 문단으로 이끌며 엮어낸 시인 공화국의 대통령. 이것이 한국 문학사에서 미당 서정주를 빼놓을 수 없게 하는 명백한 이유일 것이다. 학창 시절 많은 학생들이 <국화 옆에서>를 암송하며 밤을 새우던 일을 기억한다면, <화사>의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생명력에 몸서리 쳐 본 사람이라면, 인간 본연의 생명 의식을 담아낸 서정주 시인의 작품 세계에 흠뻑 젖어들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이토록 많은 애송시를 남긴 서정주 시인에게도 떨쳐 버리지 못한 꼬리표가 있다. 친일문학과 정치시인. 시인의 사후에 이 문제가 더 불거져 나온 것을 보면 60년의 문학 인생 중 청산하지 못한 시인의 가슴 아픈 시련의 역사이리라. 민족의 현실에 대한 외면과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평생의 오점으로 남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최근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사회 정치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인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경남 양산에서는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생가복원 사업이 취소되었고, 경남 함안에서는 조현연 문학관을 건립하려다 역시 중단이 되었다. 경남 통영에 있는 청마문학관의 운영 중단이나, 채만식문학상에 대한 사회단체의 비난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서정주의 고향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에는 시인의 대표작과 일제 말기에 쓰여진 친일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단체의 비판이 거세지고 문학관 건립에 반대하는 여론이 제기되자 유족과 문학관 관계자들은 대표적인 친일 작품인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을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여 국민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인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 일주기를 맞아 기념 시위를 주도하며 항일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고향인 고창 선운리로 돌아온다. 당시 서정주의 부친인 서광한(徐光漢)은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소유자인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농을 관리하는 농감(農監) 겸 비서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농감으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서정주는 아버지가 인촌의 집에서 농감으로 일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요구했다. 그의 부친은 결국 아들의 뜻을 따라 농감 일을 그만두고 고창읍 월곡리로 이사를 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서정주를 어렵게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을 시키지만 일본 경찰과 학교의 감시가 심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학교의 요구에 의해 서정주는 스스로 자퇴를 한다. 그 이후 수 차례의 가출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는데 젊은 시절의 이러한 경험은 미당 서정주의 작품세계에 견고하고 튼튼한 뿌리가 되었다.

 

 

  광주학생운동 기념시위를 주동하며 항일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서정주 시인이 친일 작품을 쓰게 된 것은 [국민문학]지의 편집을 맡은 1943년부터이다. [국민문학]은 최재서가 1943년 11월에 창간한 친일 문학잡지로 다수의 문인들을 동원하여 황국신민화와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20대 젊은 나이의 서정주는 이때부터 역사와 민족의 현실문제에서 회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문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소설가 김정한과 같은 절필을 하는 작가들과 청록파 시인처럼 자연 속에 몰입한 작가들도 있었고, 윤동주나 이육사처럼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작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은 권력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었고, 자의든 타의든 친일문학가라는 오명을 지니게 되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서정주 시인은 늘 민중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4․19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군부독재 앞에서 오히려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한국적 전통과 정서를 지닌 순수시인으로 남느냐, 아니면 친일 작가라는 꼬리표를 영원히 달고 다니느냐는 독자 여러분이 풀어야 할 끈이 아닐까?


질마재로 가는 길


  선운산 나들목에서 서정주 생가의 약도를 받아 들고 734번 지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고창을 찾았던 1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고속도로가 생겨났고, 문화 관광 산업에 관심을 쏟는 지자체의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논과 밭, 그리고 멀리 야산이 펼쳐진 들길을 달려가자 인촌 김성수 생가가 나온다. 약 5분쯤 더 달렸을까.

 서정주 시인의 문학과 삶의 토양이 되었다는 질마재.

 질마재는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를 가리키는 말로 ‘말이 짐을 지고 넘어 다니던 고개’라는 뜻이다. 질마재는 부안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방장산과 두승산, 변산으로 이어지는 삼신산의 모산인 소요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형상이다. 마을 앞에는 넓은 벌이 펼쳐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2001년 11월에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인수하여 조성을 했는데 그 규모가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 이 곳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 육필원고와 시집 등 총 1만 5천여 점의 전시물이 있다고 한다. 문학관 중에서는 가장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셈이다. 중앙에는 4층 짜리 전망대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각 층마다 작품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작은 창문을 통해 시인의 생가와 선운리 일대를 내다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미당시문학관은 서정주 시인의 친일 작품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결단은 사회단체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전시된 작품에는 <오장 마쓰이 송가>, <항공일에>와 해방 후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해명한 시 <종천순일파>, 1980년대 군사정권을 지지한 <처음처럼-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등이 있다. 문학관에서 해설사로 있는 서동진 선생님은 “친일 작품을 함께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현명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해설사 서동진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서정주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선운리 578번지. 1915년 5월 18일 서정주 시인은 이 집에서 태어나 줄포로 이사하는 10살까지 이 곳에서 살며 부친 서광한에게서 한문학을 배웠다. 부친 서광한은 서당을 열어 훈장으로 있다가 개화의 영향을 받아 측량기사가 되어 고창군에서 측량서기로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인촌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 김기중의 눈에 띄어 관리인 겸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를 하고 서정주 시인은 1924년에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 만에 졸업을 한다.

  서정주 생가는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942년 부친이 사망하자 친척이 거주하면서 스레트 지붕으로 개조되었고 1970년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방치되다가 서정주 시인의 사후인 2001년 8월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다. 10년 전 처음 동료 교사들과 생가를 방문했을 때에는 이웃에 서정주 시인의 친동생인 서정태 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난을 기르며 혼자 거주하던 서정태 시인의 안내를 받아 스레트 지붕의 낡은 생가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다정스레 서정주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복원이 되었고, 마당에는 우물 뒤편으로 장독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 제법 시골 마을의 정취가 묻어난다. 마당에는 최근에 심어 놓은 국화꽃이 푸른 잎을 간직한 채 노란 국화꽃을 피울 가을을 기다리며 더운 숨을 몰아낸다. 툇마루에 앉아 할머니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9살 어린 꼬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질마재는 국화꽃으로 덮이고 있다. 서정주 시인을 사랑하는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생가와 문학관 마당에 국화가 심어졌고, 시인이 잠들어 있는 문학관 옆 산기슭에도 국화꽃을 심는 아낙들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가을이 되면 묘소를 중심으로 온 산이 노랗게 물들 것이라고 한다.

 

 

 

  서정주 시인은 이제 방랑의 시간을 접고 질마재로 돌아왔다. 아내인 방옥숙여사와 합장되어 부모님의 묘소 아래에 가지런히 묻혀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그렇게 떠돌던 방황은 1970년 이후 두 번의 세계일주로 막을 내리고, 이제는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이야말로 가장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질마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서 시인은 오늘도 시상에 젖어 있지는 않을까. 

 


  날이 저물어가면서 선운사로 향하는 발길이 바빠진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입구에는 서정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인의 육필 원고를 그대로 옮겨 놓은 시비 <선운산 동구>를 읽어보며 고창의 하루를 접는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 시비 <선운사 동구> 전문 -

 

2009년 《용인문학》상반기호(13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