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사라진 곳에서 / 김윤배
소리가 사라진 수즈달 예브피미예프수도원은 모든 것들이 평면으로 움직인다 수녀들은 종이의 몸으로 미끄러지듯 돌계단을 오르내리고 비둘기는 붉은 지붕을 종이 발로 건너다닌다 장미는 종이 꽃잎 여는 미세한 소리를 어금니로 물어 새어나기지 못하게 하고 장미정원을 지나가는 바람은 구겨진 종이 몸을 가시 사이로 밀어 넣는다
소리가 사라지면 가벼워지는 몸의 기억은 검은 리본에 닿는다 모두들 고개를 숙여 침묵으로 든 한 이름을 지운다 영혼은 얼마나 가벼워져 종루를 내려서는지, 종소리를 안으로 접어 넣은 종들이 흔들리며 적막하고 맑은 햇살을 여운처럼 뿌린다 자작나무숲이 녹회색 수벽을 버리고 한 장의 그림자로 성당에 기댄다
소리로 이루어진 돌계단, 소리로 이루어진 종루, 소리로 이루어진 사제관, 소리로 이루어진 정원이 소리가 사라진 후 가벼워진 몸으로 카멘카강*을 향해 떠난다 카멘카강에는 햇살들 챙강챙강 강물에 고여 작은 종소리를 낸다 강물은 소리들이 사라진 수도원의 얇은 그림자를 담아 흐른다
* 수즈달 시내를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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