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샜어요, 엄니 / 박완호
날 샜어요, 엄니, 이제 어쩌면 좋아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깜깜한 하늘
연인들의 속삭임 들리지 않고
반가운 그림자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요
여름 한낮 무섭게 쏴대는 우박포탄들, 언제나
엄니 젖가슴처럼 환한 세상이 올까요
촛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저녁을 맞이할까요
엄니, 저는요
풀잎만 스쳐도 파랗게 튀는 꿈을 더 꿀 수 없어요
손끝만 닿아도 펑펑 터지는 고무공의 아픈 노래를 더는 들려줄 수 없어요
밖은 지금 한밤중, 여기저기서
촛불 댕기는 소리 환하게 들려오고, 노랗게
갓 피어난 꽃잎을 헤치는 물줄기를 가려가며
손바닥 우산을 씌워주는 팔짱 낀 애인들과
날갯짓을 못 배운 비둘기 새끼를 안고 광장에 모이는 엄마들
몸살 나게 그리운 시간이에요, 하지만
저만치 새벽이 오는 소리
꽃등 켜지듯 환하게 들리지 않나요
벌써 날 다 샜다니까요, 그렇지요, 엄니
계간 『시와 문화』 2009년 가을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91년 계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안의 흔들림』(시와시학사, 1999)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천년의시작, 2003) 그리고 『아내의 문신』(문학의전당, 2008)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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