別無所用 / 이은규
고장 난 오르골
화음을 잊어버린 거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태엽에 남은 겨울을 감으면 문득, 봄
긴 기다림일수록 빨리 풀리는 바람의 태엽
누군가의 입김을 동력삼아 한 꽃이 허공을 새어나온다
찢겨진 것들의 화음으로 소란한 봄
꽃은 피는 것이 아니다, 찢겨진 허공에서 새어나오는 것일 뿐
풀리려는 힘을 동력으로 삼는 것들의 節氣
열어놓은 오르골을 닫지 못하는 날이 길다
막 찢겨져 나온 꽃의 그늘을 딛으면
차라리 지독한 근시를 앓고 싶어, 앓고 싶지 않아
피 냄새로만 붉어지는 향기의 구멍
바람이 곧 화음을 거두어 갈 것을 안다
꽃이 눕는 자리에 내가 누우면 어느 도착이 있을까
혼자 볼 수 없는 꽃이 너무 가깝듯
간절한 이름은 잊어버리는 것으로 잃어버려야 하는 것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가는 봄
혼자 보는 꽃에 눈이 멀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처럼 고독하다*
바람이 이 문장을 데려가주면, 데려가줬으면
닫힐 때를 놓친 오르골 소리는 이미 바람이고
서성이는 꽃의 향기도 돌려보내야 하는 때
저 바람에게서 당신의 연착을 예감한다
풀리려는 힘을 동력으로 감기는 바람의 태엽이라 해도
화음을 잊은 오르골은 所用이 없거든
봄은 잠시만 있거든,
*마야코프스키
계간 『딩아돌하』2009년 여름호 발표
이은규 시인
1978년 서울에서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8년 《동아일보》 시부문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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