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는 것들에 대한 단상 / 이향란
세상 모든 것 다 기운다
다정한 어깨 넓은 가슴이 아니더라도 따스한 방향을 찾아
고개가 기울고 마음이 기운다
빈 거리를 떠도는 낙엽들은 뿌리를 향해
어둠은 빛으로, 풀잎은 바람 이는 곳으로 뒤척이며 기운다
높은 건물은 낮은 건물을 안고서
수많은 길들은 사람을 지나 숲에게로
바다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향해
기울지 않는 것은 마음이나 몸이 굳은 것
웃음과 울음의 촉수를 못 찾고
스스로 무너지지 못한 채 딱지만 키우는 것들
식탁에게, 옷에게, 침대에게, 그리고 가슴에게조차 기울지 못한 채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하루가 비스듬히 기울고 있다
* 시집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지혜사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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