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해부학 / 이향란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
수소와 산소,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
손을 넣어 놀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쏟아 부어도
물위 그 어떤 무늬도 건져낼 수 없을 만큼
적시며 흐르며 물은 버틴다
맑은 힘, 그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 계간 『애지』 201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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