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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이향란]-물의 해부학

by 안영선 2011. 7. 23.

 

 

물의 해부학 / 이향란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

 

수소와 산소,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

손을 넣어 놀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쏟아 부어도

물위 그 어떤 무늬도 건져낼 수 없을 만큼

적시며 흐르며 물은 버틴다

맑은 힘, 그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 계간 『애지』 2010년 겨울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