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지서(春至書) / 주영헌
형(兄),
봄입니다
겨울에 얼었던 햇살이 녹으면서 풍경 곳곳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올봄 괘념(掛念)에 물소리가 들리는 돌 하나를 굴려와 정원(庭園)에 세웠습니다. 늦은 꽃소식은 늦은 꽃들만이 풀어놓을 것이고 바람과 바람은 오래된 남남처럼 불겠지요. 짧은 서지(書誌)에 넉넉한 소식이란 터무니없고 위로를 봉함에 넣어 첨부합니다
책장 한쪽을 뒤적거리다
미열(微熱)기 가득한 발신인(發信人)을 본다
휘갈겨 쓴 서툰 봄볕에
멀리 있는 아지랑이만 허둥대고 있던 몇 년 전
얼음이 풀리기만 기다렸을 유서를 들고 찾은 물가엔 수신인도 없고 텅 빈 공란(空欄)만 배웅했을 병약한 수장(水葬)
이쯤이 걸음을 버린 곳이고, 저쯤이 허우적거림만 데리고 돌아간 곳이겠다
물가에 앉아 손이 훑은 꽃잎들을 던지는데
문득, 독자(獨子)의 영혼은 어디쯤에 붉어 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지 씨앗들이 만발하여 삭아가듯 괘념(掛念) 근처 오래 박혀 있던 가시도 봄볕을 알아채고 따끔거리며 푸른 싹을 틔워 마음 얼얼한 때
형(兄),
그 많던 공란(空欄)에 봄볕이라도 좀 꾸어다 놓았겠지요?
*『시에』2010년 가을호
* 주영헌 :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시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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