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詩읽기

[박완호]-아내의 문신

by 안영선 2011. 7. 23.

 

아내의 문신 / 박완호

 

 

1

 

아내의 몸 속엔 내가 지나온 길들이 들어 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제 속에 감추고 있던 길들을 꺼내

한 번 들어가 보라며

내게 입구를 보여준다

 

함께 산 지 십 수 년 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길들, 어느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낯설지 않은 길들의

벌어진 아가리가 꼬리를 물고 달려든다

 

주춤거리는 내게 아내는

자꾸 그 위에 발을 얹으라며, 그 길들을 따라가면

내 그리움의 뿌리를 만질 수도 있을 거라며

자꾸 나를 몰아 세운다

 

2

 

여자는 몸 속에 지나온 날들의 내력을 숨기고 있다 사랑을 나눌 때 그녀의 몸에는 남자가 걸어온 길들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아내의 몸 속 길들 위에는 기억나지 않는 내 삶의 이력이 적힌 문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 길들을 따라 걸으며 나는 문장들을 주워 읽는다 한 번도 들키지 않았으리라 여겼던 비밀들이 주워 담을 수 없는 고백처럼 수런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걸 본다

 

그녀는 언제 이 많은 문장들을 써 온 걸까 아내와 나누었던 그 많은 사랑의 순간들이 결국 내 속의 문장들을 그녀에게 옮겨 적는 작업이었다니, 아무도 몰래 그녀가 내 은밀한 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몸에도 어느새 그녀의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다니

 

 

* 시집<아내의 문신> 2008. 문학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