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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

벽을 오르다-안영선

by 안영선 2013. 12. 17.

 

 

벽을 오르다

 

안영선

 

 

 

화단을 디딘 뿌리는 힘이 없다

검버섯을 피워대는 낡은 무게의 줄기

한 때는 뚝 튀어나왔을 힘줄과 근육은

하늘을 향하는 것들에게 다 내어주고

이제 빈손을 털듯 뒷짐을 쥐고 있다

나약한 뿌리가 만든 저 무한 생의 흔적

오를수록 싱싱해지는 푸릇한 생장점마다

그 싱싱함의 이면에 딱지처럼 달라붙은 상흔傷痕

욕창이 들어 진물이 묻어나는 줄기 하나

 

지상에 주소를 둔 잎이 벽을 타고 오른다

지붕 끝에서 잠시 주춤거리는 흔들림

수묵水墨으로 다가서는 어둠의 저편에서

저녁놀에 물든 잎은 바람을 따라다니고

물질하던 낡은 뿌리는 휘청대며 자리를 잡는다

먼저 오른 잎은 정상에 깃발을 꽂듯 붉게 물드는데

허공에서 만나는 정점은 저런 것일까

등 굽은 가지가 그림자를 넓히며 지상을 향하듯

시작과 마침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깃발이 바람의 끝자락을 쥐고 흔든다

정상은 휘청대는 것들이 다시 발길을 내딛는 시작점

만년설은 저만을 위한 허공을 뒤춤에 감추고

더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쫓는 생의 정점도 이러할까

모든 길은 뫼비우스의 띠 속으로 이어져

오르는 길은 내리는 길을 찾아 돌고 도는데

하산을 꿈꾸는 셰르파의 호흡이 저리 편한 것은

목숨의 뿌리를 지상에 둔 까닭

 

오름의 끝은 지상이다

 

(계간 <문학의오늘>,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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