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廢家에서
안영선
느티나무 그늘을 찾아드는 외딴 집에서
푸지게 낮잠을 즐기던 햇살이 빠져 나간다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저녁이 오고
점점이 흐려지는 이농의 발자국이 한 점으로 채워진다
밭을 갈다 지친 농기구와 손잡이 부러진 삽을
몇 날 째 바라보는 마당 귀퉁이
머뭇거리며 맴돌던 바람이 지나가고
미온微溫이 곰삭아가는 장독대에선
민들레 홀씨가 계절의 틈을 찾고 있다
목을 축이러 나온 초승달도 우물에 내려앉으면
빈 터엔 원래의 주인들 그 흔적들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겠지.
방구들 밑에 터 잡은 눈 어두운 두더지 부부는
한 때 이곳이 화염길이었음을 알까
메아리로 남은 소 울음
견고한 그물을 손질하는 홀아비 거미
볼에 가득 묵은 도토리를 주워 담는 다람쥐
초승달마저 돌아가면 모닥불을 피우려나
이생의 가지도 물관을 잃으면
민들레 홀씨 같은 가벼운 유랑을 꿈꾸리라
한 생을 누리고 떠난 자리는
새롭게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회자膾炙는 화폭에 한 점으로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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