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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詩

안영선-주소를 잃어버리다

by 안영선 2011. 7. 23.

 

 

주소를 잃어버리다

 

안영선

 

 

푸른빛이 그늘을 늘려가는 유월에도

큰댁 처마엔 제비가 돌아오지 않았다

문 밖을 서성이는 큰아버지

도회지로 떠난 막내를 기다리듯

오늘도 대문에 빗장을 걸지 않았다

견고하게 지은 묵은 흙집은

이따금 다른 새의 둥지가 되고

거미가 주인처럼 터를 잡고 있다

 

신도시 발표에 중장비가 경작지를 질주하고

사람들의 온정마저 땅에 묻힐 때

제각기 경작지에 번지를 매기고

저희끼리 터를 나누던 제비들도

고스란히 주소를 잃어버렸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속담도

마을에서는 한낱 전설 속에 묻히고 말았다

 

철거반이 도착하기 전 날

큰아버지는 제비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흙집은 바람결에 비상을 꿈꾸지만

이내 순서 없이 바닥에 떨어져

빗물처럼 땅 속에 스며들 것이다

 

훗날 해체된 제비집의 잔해만이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을 기억하리라

큰아버지는 제비처럼 주소를 잃어버리고

퇴거 용지를 작성하던 날

제비집 잔해 위에서 울음을 펑펑 울었다

그 눈물이 채 마르기 전

떨어진 깃털 하나 씨앗처럼 싹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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