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 주영헌
소리의 후미가 나뭇잎 사이사이 숨어 있듯
문틈사이 낀 편지봉투 하나가 위급함을 알린다.
몇 개의 떨어진 잎사귀들이 길을 쓸고 다니는 골목
기침소리가 쿨럭 거리며 흘러나온다.
지병이란 오랜 친구와 같은 것
배추벌레처럼 온 몸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다가
때가 되면 배추흰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것
골목에 어둠이 오고
기침처럼 몇 집의 창문이 깜박거리고
검은 길로 검은 보폭의 친구가 떠나고
어둠은 반듯 서서 제 속을 뒤집고 있다
기침을 오래 데리고 놀았던 혀는
이 밤 화석처럼 굳어 갈 것이지만
바로 어제 한 다정한 말은 너무 멀리 잊혀져간다
죽음은 마을의 가장 떠들썩한 한 집을 골라 분주하고
적조했던 우리 사이에는
독상이 놓여 있어 나는 멀고 오래 취해 가는데
어린 배추 포기 같은 이 하안거를 떠난 친구는 날개 한 벌은 챙겼을까
빈 구멍만 늘어가는 배추의 여름
파먹었던 자리를 또 파먹고 있는 벌레
탈피의 때를 놓쳤다는 생각이 뒤늦다
가설된 전구의 불빛이 환 한 상가(喪家)
죽비처럼 목덜미를 무는 따끔, 날벌레 몇 마리
*『시에』2010년 가을호
* 주영헌 :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시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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