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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詩읽기

[주영헌]-하안거

by 안영선 2011. 7. 23.

 

하안거 / 주영헌

 

 

소리의 후미가 나뭇잎 사이사이 숨어 있듯

문틈사이 낀 편지봉투 하나가 위급함을 알린다.

몇 개의 떨어진 잎사귀들이 길을 쓸고 다니는 골목

기침소리가 쿨럭 거리며 흘러나온다.

지병이란 오랜 친구와 같은 것

배추벌레처럼 온 몸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다가

때가 되면 배추흰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것

골목에 어둠이 오고

기침처럼 몇 집의 창문이 깜박거리고

검은 길로 검은 보폭의 친구가 떠나고

어둠은 반듯 서서 제 속을 뒤집고 있다

 

기침을 오래 데리고 놀았던 혀는

이 밤 화석처럼 굳어 갈 것이지만

바로 어제 한 다정한 말은 너무 멀리 잊혀져간다

죽음은 마을의 가장 떠들썩한 한 집을 골라 분주하고

적조했던 우리 사이에는

독상이 놓여 있어 나는 멀고 오래 취해 가는데

어린 배추 포기 같은 이 하안거를 떠난 친구는 날개 한 벌은 챙겼을까

빈 구멍만 늘어가는 배추의 여름

파먹었던 자리를 또 파먹고 있는 벌레

탈피의 때를 놓쳤다는 생각이 뒤늦다

 

가설된 전구의 불빛이 환 한 상가(喪家)

죽비처럼 목덜미를 무는 따끔, 날벌레 몇 마리

 

 

*『시에』2010년 가을호

* 주영헌 :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시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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