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넣는 쉼 없는 작업
- 이원오 시인 『시간의 유배』
안영선(시인, 용인문학회장)
이원오 시인은 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을 했지만 이미 좋은 시를 많이 발표한 역량 있는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 그가 등단 4년 만에 첫 시집 『시간의 유배』를 상재했다. 시인과 필자는 동갑내기라는 공통점 외에도 함께 용인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을 통해 창작의 꿈을 키우던 문우이자 용인문학회 임원을 맡아 이끌어가는 문학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누구보다 축하의 마음이 앞서는 것은 감출 수 없다. 필자가 이원오 시인과 함께 문학수업을 받던 시절, 독자들보다 먼저 그의 시편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이는 남들이 갖지 못한 행운이기도 했다. 남들보다 먼저 첫 독자가 된다는 것은 시인의 순결한 첫 마음을 먼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도 하다.
이원오 시인은 꽤나 해박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해서 한자에 꽤 식견이 있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으며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은 고스란히 시인의 숨결을 통해 생명을 얻곤 한다.
천리가 떨어진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라// (생략) 시간이 나를 가두었으므로/ 유형이라는 이름의 공간에/ 영혼을 단련시켰다/ 시간의 공포가 엄습했다/ 시간의 죽음은 망각이었고/ 벼루 열 개를 닳아 없앤 뒤/ 그 멈춤을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공간을 성글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배는 시간의 죄를 묻는 것이다/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되듯이
「시간의 유배」 중에서
이 시는 시집의 표제가 된 작품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힘들고 외로웠던 유배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단절된 공간과 단절된 시간이 주는 공포를 문장으로 이겨낸 추사의 정신은 오롯이 시 창작에 열정을 쏟았던 이원오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이들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윤선도, 남구만, 정약전, 허초희, 미실, 매창, 이순신, 남이, 전봉준, 백석, 신돈, 경허 등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 굵직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그를 만나 시의 숨결을 얻은 인물들은 높게는 권문세족으로부터 기생과 농민, 승려, 시인 등 다양한 신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치열한 권력의 투쟁 속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며 민중의 삶을 대변하다가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들의 삶은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절 없이 현대를 사는 독자들에게 그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든 그의 시는 역사라는 과거를 모티브로 하지만 항상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지향형이다.
(생략) 사냥이 끝나면 아버지는 의식의 일부인양/ 어린 담배 이파리를 말아 피운다/ 연기는 울음을 허공으로 나르고/ 그만큼의 한숨은 혈관을 타고 돌았다/ 오랜 허기를 달래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사변이 났다고 했다/ 남부군을 추격하던 그해/ 오소리 굴에서 은신하는 빨치산을 발견했다던/ 그해 오소리 사냥을 떠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각혈의 자리에는 꽃이 피고 있었다
「오소리 울음」 중에서
우리가 과거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역사였다. 역사적 사건의 본질들은 철저히 왜곡되었고 이념과 사상의 극단적 대립만을 부각시키면서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 대립각 속에서 우리 기억 속에 남았어야 할 많은 진실들이 왜곡되어 갔던 것은 아닐까. 이원오 시인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찾아 시의 숨결을 불어넣는 쉼 없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빨치산은 정치·사회·종교·이념적 변혁의 시기에 자신의 사상이나 입장을 지키기 위하여 무력으로 항쟁하는 사람들의 별칭으로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 수업에서는 ‘빨치산=빨갱이’로 규정짓는 작업이 이어져 왔었다. ‘빨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멸시하는 의미를 담아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 하는 존재’라는 극단적인 의미를 담게 되었다.
시 「오소리 울음」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지닌 이러한 아픔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오소리 사냥을 다니던 아버지의 삶을 통해 오소리처럼 살았을 그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아버지 역시 한 마리 오소리처럼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미래지향형인 것은 시에 부활의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혈의 자리에는 꽃이 피고 있었다’는 표현은 죽음이 불멸의 이미지를 갖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은 순환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외부의 압박 속에서 꽃은 피고 지지만 떨어진 꽃에서 살아남은 씨앗이 다시 생명을 키우는 고귀한 삶이 반복되는 한 아픔의 역사는 독자의 가슴 속에서 잊히지 않고 불멸의 생을 얻을 것이다.
(생략) 모든 기울기는 결핍을 수반한다/ 결핍은 모자람이 아니며/ 과잉의 동의어이다// 배의 기울기에는/ 숨겨놓은 탐욕의 과잉이 있었다/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실종이 있었고/ 비겁한 잉여의 민낯이 있었다/ 짠물에 민물을 일치시키던 수평/ 거친 파도를 이기는 힘이었고/ 결별을 허락하지 않은 마지노선이었다/ 힘은 무릇 수평에서 왔으나/ 견고한 욕심의 무게는 수평을 짓눌렀다/ 모두 기울기를 저울질하고만 있었으니/ 고박하지 않은 양심도 풀어져 버렸다// 그날 서해바다에서 찔끔찔끔 흘려버린/ 물의 기울기는/ 거친 맹골수도에서 가팔라졌다/ 잃어버린 눈물의 평형수만큼/ 피눈물로 꼭꼭 채워 넣어야 했다// 지금, 당신의 평형수를 충만해야 할 시간이다
「평형수를 충만할 때」 중에서
이원오 시인이 등단한 2014년은 세월호 침몰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여 전 국민을 분노케 한 시기였다. 벚꽃이 한창이던 사월, 삼백 네 송이의 소중한 생명이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우리 가슴 속에서 별이 되었다. 사회 각층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추모와 책임을 묻는 시위가 이어졌으며 문단에서도 많은 시인들이 추모의 시를 발표하며 국민과 유족의 아픔을 위로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실로 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원오 시인의 시 「평형수를 충만할 때」 가 가장 가슴을 뭉클하게 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발표된 많은 시들이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정서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원오 시인의 시는 절제된 정서에 바탕을 두고 담담한 어조로 사건의 원인을 조명하고 있다. 이 냉철하고 담담한 어조는 분노와 눈물보다 더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탐욕이 비극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평형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생략) 체彘라고 불린/ 이 용맹한 전사는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하고/ 잡혀 거세 되었다[豖]/ 본능이 거세된 전사는 꿈틀대지 않았고/ 주는 대로 먹어대며 살이 쪄 갔다/ 굳이 벌판에 있을 필요가 없어져/ 사육되니 집[家]이 생겨났다/ 야생을 잃고 한없이 꿀꿀대는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생 돼지[豚]가 되어 갔다(생략)
「사육」 중에서
이 시는 소재부터가 신선하다. 누가 돼지를 이렇게 깊이 사유할 수 있었을까. 야생의 삶을 살던 돼지가 가축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집과 먹이를 얻지만 원시의 들녘을 질주하던 본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육이라는 단어는 철저히 인간 본위의 언어이다. 사육은 짐승이 지닌 야생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이다. 이 맹목적인 작업은 인간 또한 누군가에 의해 거세되고 사육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彘-豖-家-豚’라는 한자를 사용하여 언어가 지니는 미묘한 어감과 문자 이미지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인이 지닌 이러한 언어적 유희의 정점은 시 「신돈을 굽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생략) 콧수염은 짧게 자르고, 턱수염은 그대로 두어라// 명성이 높아질수록 수염의 면적은 넓어지고/ 지상최대의 현상금이 걸렸다/ 추적자를 따돌리며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고단함/ 수장당한 주검이 아라비아 만 해저에서 떠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검은 바다/ 순교자는 자신의 피를 뿌려야만 영원히 호명되듯이/ 그의 수염은 누구도 깎을 수 없어/ 이를 두려워 한 자들은 바다에 던질 때에/ 그냥 두었다/ 지금쯤 알 수 없는 지구 어느 곳에서 턱수염이/ 제국주의자들처럼/ 자라나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턱수염에 관한 고찰」 중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테러리스트와 턱수염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였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턱수염이 권위의 상징이었다 한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현상이었을 것이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도 역시 콧수염은 자르고 턱수염은 기르라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원오 시인은 턱수염을 테러리스트의 트레이드마크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투에서 이슬람 신자인 무슬림들은 모두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비무슬림이었던 사람들은 콧수염만 기르고 턱수염은 깎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턱수염이 피아의 식별법으로 사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테러집단 IS는 수염을 기르는 목적 중 하나가 자신들의 강인함과 우월성을 표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에 있어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은 경계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제국주의자들처럼 자라나고 있는 턱수염은 없는 것일까.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갑질 논란의 주역들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테러리스트의 턱수염은 아닐까.
이원오 시인의 시집 『시간의 유배』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즐거운 상상을 했다. 시집에는 모두 7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다른 시집들에 비해 다소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시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이리라. 이 시집은 문단에 신선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시집 전체를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넣는 쉼 없는 작업’으로 매듭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원오 시인의 시집 상재를 축하하며 더 좋은 작품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이 상재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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