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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쓰는散文

봄을 노래하는 언어의 발랄한 상상_이은규 시인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by 안영선 2019. 10. 18.

 

봄을 노래하는 언어의 발랄한 상상

- 이은규 시인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안영선(시인, 용인문학회장)

 

 

 

이은규 시인이 첫 시집 다정한 호칭이후 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를 상재했다. 이 시인은 2006국제신문신춘문예에 시 조각보를 짓다, 2008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이 당선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이은규 시인은 등단 후 매년 좋은 시에 선정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총망 받는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제 훌쩍 10년을 넘어선 중년 시인으로서의 시력과 내공을 지닌 시인, 필자에게는 본받고 싶은 문단의 선배 시인이기도 하다.

시인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겸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인은 그런 시인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한때 용인에 거주하면서 용인문학회와 연연을 맺은 시인은 바쁜 시간 중에도 용인문학편집위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지역 문학지에 쏟는 애정은 시인의 겸손한 인성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필자가 등단하기 전, 늘 곁에서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모습은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또한 본받고 싶은 덕목이었다.

 

두 번째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에 대해 출판사는 서평에서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는 등의 익숙한 소재로부터,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들/ 일들의 운동성과 그것이 환기하는 존재와 부재를 포착해내는 데 탁월한 그. 마치 한곳에 소리 없이 선 채 만물이 피고 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그만의 섬세한 세계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펼쳐진다.’고 말한다.

주로 서사 중심으로 시를 쓰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 시인의 시를 오롯이 읽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시적화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보다는 독자의 입장에서 자의적인 감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은규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시 중에서 많은 작품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봄이다. 필자는 봄과 관련된 작품을 몇 편 선정해 보았다. 계절의 시작인 봄이 독자들에게 주는 보편적 이미지와 시인이 읽어내는 이미지의 관계를 상상해 보는 것도 새삼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봄은 이은규 시인의 시세계에서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중요한 소재이자 동시에 주제를 형상화하는 시적 대상이기도 하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중력이었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최후.이미여한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가도 가도

봄이 계속 돌아왔다

 

* 이상의 최후

- 오는 봄전문

 

시인은 짧은 시 오는 봄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중력이었다고 말한다. 중력에 의해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고 아픈 지구는 그 어떠한 것도 싹을 틔우지 못한다. 시인 이상의 말대로 최후인 셈이다. 그러나 중력이 주는 아픔은 끝일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새로운 생명을 피우기 위한 봄은 쉼 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은 어떠한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계절의 변화와 계속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리라.

 

겨울의 뒷모습과 매듭을 잊은 시간으로부터

 

나는 오늘 상춘객, 꽃 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차가운 손끝 혼자의 나들이 물어물어 찾아간 청매홍매야 내 마음이 들리니 목소리가 들리니 봄의 입김으로 풀리는 살갗이 환하게 아프겠다, 아프지 않겠다

- 매화, 풀리다중에서

 

귀가 아플 만큼 고요한 날

귀를 자른 그는 미친 듯이 웃는 것으로 한 계절을 앓았다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 꽃소식입니까중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은 아마도 매화가 으뜸일 것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매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많은 상춘객 중에 남도의 섬진강을 따라 만개한 매화를 감상하면서 그 이면에 있는 겨울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될까. 인고의 과정 없이 피는 꽃이 있을까. 아픔 없이 피는 꽃이 있을까. 꽃을 피우는 것은 산고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개화를 봄의 입김으로 풀리는 살갗이 환하게 아프겠다, 아프지 않겠다.’고 무심한 듯 던지지만 독자의 마음은 이미 환하게 아프겠다에 머물면서 봄을 맞는 시인의 정서를 읽게 된다.

이때 피어나는 꽃은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으로 피어난 것이리라. 그러니 시인의 말처럼 꽃잎은 쇠보다도 더 단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스스로 귀를 잘랐던 빈센트 반 고호를 떠올렸을지도 모르리라. 고흐는 귀를 자른 1888년에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20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고흐의 작품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고흐에게도 시인에게도 봄소식은 아픔을 통해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문득 이호우 시인이 꽃이 피는 절정의 순간을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한 고비.’라고 노래한 개화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때로 어떤 순간은 영원이 되고

끝나는 듯 시작되는 길 위, 우두커니

무심코 지나친 풍경이거나 놓쳐버린 시간

 

저기 어떻게 흩날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고요하게 흩날리고 있는 점점의 벚꽃들이

사이드미러 풍경 안에 고여 있다

그 시간 속에 씌어 있는 한 줄 문장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기억은 언제나 우리를 앞지르며 도착해 있다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모든 봄은 지난봄을 간직한 채 피어오르고

-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중에서

 

우리는 때로 시간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은 때때로 과거를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런데 문득 예고 없이 다가오는 과거의 기억들, 그것은 아픔일 수도, 슬픔일 수도, 기쁨일 수도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기억들이 어느새 바로 앞에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혹시 착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전 중에 사이드미러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앞 차를 추월하거나 차선을 변경하는 경우 사이드미러에 비친 풍경은 이따금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인은 무심코 지나친 풍경이거나 놓쳐버린 시간사이드미러 풍경 안에 고여 있다고 말한다. 사이드미러에 갇힌 풍경은 실제보다 가깝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어쩌면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불쑥 다가온 벚꽃은 계절의 변화를 맞이하기도 전에 미리 흩날리고 있다. 기억처럼 우리를 앞질러 오는 계절은 겨울에서 오는 봄이 아니라 지난, 또 그 지난봄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봄을 다 걷지도 못했는데

이 가을 잘못 날아든 매화 소식은

꽃 이야기입니까, 기억 이야기입니까

(중략)

사랑 이야기입니까, 재앙 이야기입니까

이 가을 잘못 날아든 매화 소식은

지난봄을 다 걷지도 못했는데

- 매핵梅核중에서

 

이 시는 가을에 이야기하는 봄 이야기로 읽힌다. 이 시에서는 매핵기를 매개체로 하여 봄과 가을이 한 시간의 선상에 놓여 있다. 매핵기란 목안에 매실과 같은 작은 덩어리가 맺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병증으로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시의 모티브가 된 매핵기를 통해 꽃 이야기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봄을 다 걷지도 못한아쉬움을 매핵기를 통해 이끌어내는 시인의 감성이 신선하기만 한다. 시작과 마무리라는 상반된 시간은 어찌 보면 동일한 선상에 있으며 가을이 봄으로 연속되는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환하게 아프겠다, 아프지 않겠다// 눈 뜨면 아프기도/ 눈 감으면 아프지 않기도 하니까// 누군가의 생각을 짐작하겠다, 짐작하지 못하겠다(매화, 풀리다중에서)

세상의 꽃소식인 것 같기도, 아닌 것도 같은(꽃소식 입니까중에서)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마라(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중에서)

사랑 이야기입니까, 재앙 이야기입니까(매핵梅核중에서)

 

이은규 시인의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식 중에 대칭적 대립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대립적 구조는 대조를 통해 대상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효과가 있다. 위에 선정한 작품 5편 중 4편에는 이러한 표현이 시문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시집 전체로 보면 더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구조의 시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시인이 의도한 시적 장치이며 이은규 시인의 여러 시문이 갖는 형식적 규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자들은 상반된 구조를 통해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언어가 주는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시문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시인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의 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한시인의 시간과 풍경을 좇는 작업은 언어의 발랄한 상상이다. 이은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언어가 주는 발랄한 상상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