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서정으로 자연과 교감하다
- 이경철 시인의 『그리움 베리에이션』
안영선(시인)
이경철 시인의 첫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경철 시인의 순수하고 가식 없는 얼굴이다. 시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의 시에 담긴 그리움과 서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경철 시인은 중앙일보 문학전문기자로, 문학평론가로 더 많은 이름을 날렸다. 기자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는 일간지에 시인의 시집을 소개하며 마음에 드는 시집을 읽게 되면 그 고마운 마음을 시인에게 술로 대접했다는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여는 기자와는 많이 달랐었다. 정말 시를 사랑한 기자였으며 평론가였다. 이러한 시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환갑이 넘은 늦은 나이에 처녀시집을 상재하는 기쁨을 맛보게 했던 것이다.
이경철 시인은 필자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필자가 2013년 문예지로 등단할 때 심사위원을 맡아 사제의 연의 맺었다. 그 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용인으로 내려와 용인문학의 편집고문을 맡아주시는 등 지역문학 활성화를 위해서도 아낌없는 노력을 해 주셨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더욱이 첫 시집을 용인문학에 소개할 수 있는 것도 필자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경철 시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조심스럽지만 옛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고, 박용래 시인의 「겨울밤」을 읽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말은 시적 정서와 시인의 이미지가 일치할 정도로 시에 꾸밈이 없고 진솔하며 순수한 서정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경철 시인의 시는 현학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이것은 독자와의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는 큰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읽히지 않는 시보다는 잘 읽히는 시가 독자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에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 별거 아니에요/ 가뭇없이 한 해 가고 또 너도 떠나가는 거 // 별거 아니에요/ 바람 불고 구름 흘러가는 거/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마음 그림자 지는 거/ 마음 그림자 켜 켜에 울컥, 눈물짓는 거/ 별거 아니에요
- 「그리움 베리에이션」 중에서
이 시에서 시인은 그리움의 정서를 일상적인 것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는 거’처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데서 오히려 그리움은 더 증폭되고, 극대화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이다. 담담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담아내는 저 그리움의 서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의 진솔한 삶이 시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이경철 시인은 꽃을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에는 민들레꽃를 비롯하여 개망초꽃, 감자꽃, 창포, 나리꽃, 붓꽃, 모과꽃, 칡꽃, 구절초, 소나무꽃 등 많은 꽃들이 등장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꽃들은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꽃들이다. 그냥 스쳐 지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천지간 부칠 데 없는 이 내 마음만/ 송홧가루 되어 아리게 날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처럼 시인은 이러한 꽃들이나 자연물을 객관적 상관물로 사용하여 시인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꽃들은 다른 시인들과는 사뭇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꽃의 색채는 자연의 색이다. 빨강, 노랑, 파랑의 강렬한 원색이 아니라 선홍빛, 치자빛, 연분홍, 연자줏빛 등 야생의 꽃에서 얻어낸 전통적 정서의 색이다. 서양의 파스텔 톤과도 비슷하지만 닮지 않은 미묘한 색채를 지녔다. 그 색채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이거나 서정이 변주된 색일 것이다.
가만히 보니/ 개망초꽃도 꽃이네요/ 바람 부는 대로 꽃이네요//가만히 보니/ 감자꽃도 꽃이네요/ 하얀빛 자줏빛/ 바람에 날리는 꽃이네요// 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는 여직 꽃이 아니데요/ 건들건들/ 바람만 맞고 있네요
- 「여름꽃」 중에서
이 시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맑은 눈을 보여주고 있다. 들판이나 밭에 가득한 개망초꽃이나 감자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후리지아처럼 향기 가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개망초꽃과 감자꽃을 통해 완성된 자연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또한 시에서 시적화자는 개망초꽃이나 감자꽃처럼 자연과 동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물아일체의 자연친화적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리라.
대낮에 첫눈이 왔다는데/ 반시간 가량 눈답게 휘몰아쳤다는데/ 그걸 못 본 다음날/ 대낮부터 먹먹한 하늘에 이제나 저제나/ 눈이 올라나 펑펑 쏟아질라나 기다렸는데/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 사이사이 화들짝, 첫눈이 왔네요/ 서러울 것도 없이/ 희끗희끗 눈이 나려 쌓이고 있네요.
- 「첫눈 머리에」 전문
시 「첫눈 머리에」는 흰색이라는 색채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재미를 더해주는 작품이다. 첫눈의 이미지를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흰 머리카락으로 전이시켜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내고 있다. 시인은 ‘서러울 것도 없이’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이 담담한 표현 속에는 늙음에 대한 극대화된 서러움이 반어적으로 가득 담겨 있다. 시 「자목련」, 「낭만에 대하여」, 「건달바」 등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담아 성찰의 자세를 보고 주고 있으며, 「산 그림자」나 「칡꽃, 징글맞게 예쁜」, 「낙엽」 등은 극서정성을 통해 시의 회화적 이미지를 극대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경철 시인의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은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통적인 서정을 지니고 있으며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일반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곳곳에 담겨 있다. 시인은 어렵게 쓰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라 독자와 소통하고 읽힐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세상에 쉽게 쓰여 지는 시는 없다. 시인은 소통을 위해 언어를 갈고 닦는다는 것이다. 이경철 시인이야말로 한국의 전통적 정서의 계보를 잇는 서정 시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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